제1절 문제제기
제2절 시기 구분: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시기 |
경제체제 |
권력관계 |
복지체제 |
자족적 분배체계의 소멸 시기 1910~1919년(제1기) |
·자작농의 몰락과 소작농의 증가 ·식민지 지주제의 형성기 |
·일제 지배체계 성립 ·소작농의 증가 ·식민지 지주의 증가 ·우파 주도 민족해방운동 |
·지주 중심의 분배체계 형성기 |
소작농 중심의 분배체계 요구 시기 1920~1933년(제2기) |
·식민지 지주제의 확립기 ·대 일본 이출 증가로 인한 미곡의 상품화 확산 |
·지주와 소작농의 양극화와 불평등 확대 ·노동운동의 탄생(지역별·직업별 노동조합의 형성) ·민족해방운동·민족주의에서 사회주의로 헤게모니 이전 ·사회주의운동의 등장 |
·지주 중심의 분배체계 동요기 |
탈상품화 요구의 등장 시기 1934~1945년(제3기) |
·조선 산업구조의 변화(농업에서 공업으로) ·중화학공업 중심의 공업화 ·일제 독점자본의 확장기 |
·부르주아 민족해방운동의 예속화 ·노동계급의 증가(산별노조의 형성) ·좌파 중심의 혁명적 노동조합과 농업조합이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주도 |
·자본 중심의 분배체제로의 이행과 ‘탈상품화’ 요구의 등장 |
일제강점기는 통상적으로 세 시기로 구분된다. 대체로 1910년 강제병탄에서 1919년 3·1독립운동까지를 첫 번째 시기로, 3·1독립운동 이후부터 일제의 만주침략(1931년 9월 18일)까지를 두 번째 시기로, 만주침략 이후부터 일제가 패망한 1945년 8월 15일까지를 세 번째 시기로 구분한다. 첫 번째 시기를 무단통치 시기, 두 번째 시기를 문화통치 시기, 세 번째 시기를 대륙침략 병참기지화 시기로 부른다. 연구자에 따라 세 번째 시기를 다시 두 시기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1931년 만주침략부터 1937년 중일전쟁까지와 중일전쟁 이후인 1938년부터 일제가 패망한 1945년까지다. 일제강점기를 이렇게 구분한 것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 방식의 변화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일제의 식민지 지배방식에 따라 구분하는 것은 한국 역사를 ‘한국 중심적 관점’에서 분석하려는 『기원과 궤적』의 관점과는 거리가 있다. 특히 『기원과 궤적』의 목적이 한국 복지체제의 역사를 서술하는 것에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일제강점기의 시기 구분은 복지체제의 변화를 중심으로 할 필요가 있다.
현상적으로 식민지 지배방식의 변화에 따른 시기 구분과 복지체제를 중심에 놓은 시기 구분이 동일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상적으로 동일한 시기 구분이 적용된다고 해도 그 근거와 기술 내용은 상이하다. 한 시기를 어떻게 서술하고 설명할 것인가는 어떤 측면에서 그 시기를 바라볼 것인가에 따라 상이하기 때문이다.(508) 예를 들어, 토지조사사업(1910~1918년)과 산미증식계획(1920~1933년)은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식민지 조선을 일본 제국주의의 식량과 원료 공급지로 재편한 것이고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일제의 식민 지배에 우호적인 계층(지주계급)을 강화한 정책이었다. 하지만 복지체제의 관점에서 보면 토지 조사사업과 산미증식계획은 토지의 경작권을 박탈당한 소작농을 대량으로 양산해 전통적 농업사회와는 상이한 새로운 분배 욕구를 형성시킨 정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복지체제의 관점에서 시기를 구분한다는 것은 복지정책과 함께 복지 욕구의 변화를 야기하는 경제적·정치적 변화를 중심으로 일제강점기를 구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509)
분배체계의 관점에서 일제강점기는 크게 세 시기로 구분된다. 첫 번째 시기는 1910년 강제병탄에서부터 시작해 1919년까지다. 이 시기에는 토지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을 보장한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조선의 농업구조가 ‘식민지 지주제’로 전환되어갔다.(509)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토지에 대한 지주의 배타적 소유권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조선 후기부터 시작된 농민층의 분해를 가속화함으로써 토지 없는 농민을 대규모로 양산했다. 토지에 대한 어떠한 권리도 인정받지 못하는 소작농이 대규모로 양산되었다는 것은 환곡과 같은 ‘자작농’ 중심의 전통적 분배체계를 대신하는 ‘무토지 소작농’ 중심의 새로운 분배체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배체계의 목적이 ‘자작농’의 생산력을 보전하는 것에서 대규모 무토지 농민의 재생산 능력을 유지함으로써 식민지 지주제의 생산력을 보전하는 것으로 변화해간 것이다.
두 번째 시기는 1918년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되고 ‘식민지 지주제’가 본격적으로 식민지 조선의 지배적 생산관계로 자리 잡기 시작한 1920년부터 일제가 산미증식계획을 폐기한 1933(1934)년까지다. 이 시기에 토지조사사업으로 지주의 배타적 소유권이 제도화되면서 정치적으로 식민지 조선 내 권력관계에서 소작농에 대한 지주의 결정적 힘의 우위가 만들어졌다. 경제적으로는 토지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을 보장받는 식민지 지주가 산미증식계획을 통해 대 일본 미곡 이출을 본격화한 시기다. 농업생산의 상품화가 ‘식민지 지주제’에 기초한 미곡의 대 일본 이출의 증가라는 형태로 가속됨으로써 부가 지주에게 집중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식민지 조선에서는 지주와 소작농으로 대표되는 계급 간 양극화와 불평등이 심화되어갔다. 이 시기에 분배에 대한 요구는 조선인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소작농의 생활 안정을 보장하라는 것이었다.(510)
세 번째 시기는 1933년부터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다. 이 시기의 경제적 특성은 산업생산에서 농업생산의 비중이 감소하고 광공업의 비중이 급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특히 일제가 중국에 대한 침략전쟁을 일으킨 1937년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는 본격적인 병참기지화정책이 시행되면서 화학, 제철, 기계 등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화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노동계급의 수를 증가시키고 식민지 조선의 권력관계를 복잡한 모습으로 만들어나갔다. 1920년대까지의 권력관계가 ‘일제와 지주의 연합 대 소작농’의 대립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면, 193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권력관계는 ‘일제, 지주, 자본가의 지배 연합과 소작농, 노동계급’이 대립하는 양상으로 변화되어갔다. 이러한 산업구조와 권력관계의 변화는 사회적 분배의 변화를 야기했을 것이다. 주목할 만한 현상은 이 시기의 식민지 조선에서 노동계급의 탈상품화에 대한 요구가 중요한 복지 요구로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511)
제3절 일제강점기의 조선 경제
일제강점기의 조선 경제의 성격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는 매우 논쟁적인 주제가 되었다. 특히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의 기원을 일제강점기로부터 찾으려는 일련의 학술적 시도가 1980년대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비판자들로부터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불리는 이러한 시도는 일제강점기를 ‘일제에 의한’ 개발의 역사로 설명하는 것은 물론 1960년대 이후의 고도성장의 기원 또한 일제에 의한 개발에서 찾았다. 이러한 주장은 1980년대 초 미국 학자들로부터 시작되어 1980년대 중반에 일본에서 반향을 일으켰고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 당시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였던 안병직을 중심으로 한 일군의 학자들이 동조하면서 논쟁을 촉발시켰다.(511)
쟁점은 일제에 의한 개발이 1960년대 이후에 일어난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의 기원인지 여부와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진 조선(지역) 경제의 변화를 개발로 볼 것인지 수탈로 볼 것인지의 여부다. 특히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일제강점기와 196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ㅇ녀속성을 주장하면서 현대 한국 자본주의의 기원을 일제강점기에서 찾는다. 이러한 주장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하지만 역사는 연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가 현재 한국 경제의 모습과 관련되어 있다는 주장은 너무나 상식적이다. 같은 맥락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주장하는 일제강점기의 변화가 조선 후기의 내적 변화와 무관하다는 주장 또한 받아들이기 어렵다.(512)
수탈과 개발을 둘러싼 쟁점을 볼 때도 자본주의 사회가 ‘착취’와 ‘개발’이라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일제강점기에 수탈과 개발이 공존했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이다.(512) 핵심은 그 수탈과 개발의 주체와 내용이다. 누가 조선 민중을 수탈하고 개발했는지, 수탈과 개발의 이유는 무엇인지, 수탈과 개발이 식민지 조선에 살았던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가 보다 더 중요한 문제다. 더욱이 전근대 사회에서 ‘온전한’ 근대 사회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국민국가의 형성, 산업화, 민주주의를 완수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누가’ 개발과 수탈의 주체였는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강점기의 변화는 ‘민족’을 사상하고는 설명할 수도 설명될 수도 없다. 민족을 사상하고 일제강점기의 변화를 설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이미 ‘근대’라는 개념으로부터 이탈한 것이다.(513)
제3절의 목적은 한국 사회가 자본주의 세계체계에 편입된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지역) 경제의 변화가 일제강점기에 어떠한 모습으로 형성되어갔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특히 일제강점기의 경제체제를 분배에 대한 새로운 요구가 형성되었다는 관점에서 읽어낼 필요가 있다. 전자본주의적인 생산관계가 해체되고 계약에 의한 새로운 자본주의적 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은 전자본주의 사회에 존재했던 분배체계의 해체를 의미하는 동시에 새로운 분배체계에 대한 요구를 증대시키기 때문이다. 실제로 1930년대 이후에 확산된 식민지 공업화는 조선 사회에 본격적으로 노동자라는 새로운 계급을 형성했고, 이는 임금 인상, 산업재해에 대한 보상 등과 같은 전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분배에 대한 요구를 조선 사회에 확산시켰다.(513)
1. 자(소)작농의 몰락과 식민지 지주제의 형성: 1910~1919년
일제강점기의 조선 경제에 대한 이해는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였다는 명백한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는 일제강점기 동안 이루어진 어떤 개발도 일본 제국주의의 이해에 복무하는 식민지 조선이라는 전제하에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설령 그 개발로 조선 경제가 외형적으로 성장했고 1960년대 이후의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이 이 시기의 개발과 관련이 있다고 해도 당시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의 이해에 복무하는 식민지였다는 사실에는 변화가 없다.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서 추진했던 개발이라는 경제 행위는 식민지 지배라는 정치 행위와 분리해서 논의될 수 없다.
1910년부터 1919년까지 식민지 조선 경제의 특성은 당시 식민지 조선과 일본 간에 구축된 분업체계를 검토함으로써 이해될 수 있다. 1920년대까지 조선에 대한 일제의 산업정책은 농업개발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공업개발은 일제의 관심 영역이 아니었다.(514) 일제가 조선을 병탄한 이후 추진한 정책도 조선의 농업을 일본 자본주의의 요구에 따라 재편하기 위한 토지조사사업이었다. 일제가 토지의 사적 소유화를 통해 조선의 농업구조의 재편을 시도한 것은 1905년 통감정치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일제는 조선을 일본의 식량 공급지로 만들기 위해 미곡을 대량으로 상품화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서는 수리시설 등 효율적 생산을 위한 제반 조건이 갖추어져야 했다. 그런데 미곡의 상품화에는 다른 작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규모 자본이 투자되어야 했기 때문에, 일제는 조선의 토지 소유관계를 대규모 투자가 가능한 지주제로 개편할 필요가 있었다. 지주의 배타적 토지 소유권을 제도화한 것은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시작하기 전인 1908년 대한제국의 탁지부령을 통해서였다. 탁지부령은 광무양전(1898~1904년) 당시만 해도 인정되던 토지에 대한 실제 경작자의 경작권(영구소작권, 소작료 정액제, 소작지 전대권)을 부정하고 지주의 소유권만을 배타적으로 보장하는 조치였다. 1910년부터 시작해 1918년에 종료된 토지조사사업은 일제가 1905년 통감정치 시기부터 추진한 토지 소유권의 재편을 완결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조선의 농업구조는 일본으로 쌀을 이출하기에 용이한 ‘식민지 지주제’로 급격히 재편되어갔다. 토지 소유권의 재편은 일제의 목적에 따라 조선 농업을 재편하기 위한 전제조건이었다.(515)
논쟁은 토지조사사업의 과정과 결과의 해석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식민지 근대화론자의 입장에서 보면 토지조사사업은 식민지 조선이 근대적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배타적 소유권을 확립하는 조치였다. 토지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이 확립됨으로써 조선에서 1920년대에 미곡의 상품화를 통한 자본축적이 가능했고 1930년대에 식민지 공업화를 추동했던 수요 증대의 기반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더불어 토지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이 확보됨으로써 토지는 비로소 상품이 되고 자본으로 활용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칼 폴라니는 상품이 아닌 토지를 상품화한 것을 근대 자본주의의 중요한 특징으로 이해했다. 나카무라 사토루도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식민지 조선에서 근대적 토지 소유권을 확립함으로써 상품경제를 확산하고 농민층 분해를 촉진해 지주제를 강화하는 동시에 대규모 저임금 노동력을 창출해 조선의 자본주의화에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식민지에서 배타적 토지 소유권을 제도화하는 방식으로 식민지 지주제를 구축한 것은 일제만의 고유한 지배 방식은 아니다. 배타적 토지 소유권의 확립은 식민지를 직접 지배했던 제국주의 국가들의 공통적인 지배방식이었다.(예 프랑스-베트남).(516)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토지로부터 유리된 대규모 유휴 노동력을 창출하는 것은 자본주의 성립의 중요한 전제를 충족시켜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북서유럽에서 산업자본주의의 성립은 생산수단으로부터 이탈된 대규모 유휴 노동력이 창출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농촌에서 발생한 대규모 유휴 노동력의 존재는 곧 공장에서 일할 수 있는 풍부한 노동력의 창출을 의미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한 자(소)작농의 몰락과 소작농의 급증은 토지로부터 유리된 대규모 유휴 노동력 창출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식민지 조선의 자본주의화를 위한 과정이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토지조사사업으로 농민층이 급격히 분해되었고, 1930년대 초반까지 농업 분야에서 과잉 노동력이 지속적으로 배출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식민지 조선이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농업 부문에서 형성된 대규모 유휴 노동력을 수용할 수 있는 산업기반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제는 적어도 1931년 만주를 침략하기 전까지는 조선을 공업화할 어떤 계획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일제에게 식민지 조선의 역할은 일본의 노동계급에 공급할 저렴한 식량을 생산하는 것이었다. 농촌에서 발생한 과잉 노동력에 대한 산업 수요가 없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소작농들이 삶을 영위하는 길은 지주의 절대적 힘의 우위가 제도화된 식민지 지주제에 순응하거나 화전을 일구거나 도시의 최하위 빈곤층인 토막민이 되는 길밖에 없었다. 이마저도 불가능하다면 조선을 떠나 만주, 일본 등 해외로 이주하는 것 이외에 다른 대안은 없었다.(517)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조선의 농업구조를 토지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을 확보한 지주와 경작권을 상실한 소작농 관계, 즉 식민지 지주제로 변화시켰다. 또한 일본의 식민 농정의 핵심세력이 중소지주에서 대지주로 전환되는 계기도 되었다. 미곡 증산과 상품화를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많은 자본이 투하되어야 했기 때문에 미곡의 상품화는 중소지주보다는 대지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했다.(518) 농업이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조선 사회에서 농업구조의 변화는 곧 조선 사회 전체의 변화를 의미했다. 조선의 농업구조가 식민지 지주제로 전환됨으로써 조선 내 권력관계와 조선 사회의 생산력을 유지하기 위한 분배체계에 대한 요구도 변화했다.(519)
··· 토지조사사업의 약탈적 성격은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 경제로 재편하려 했다는 점에서) 민족적인 동시에 (지주의 토지 집적을 강화했다는 점에서) 계급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522)
2. 미국의 상품화와 지주제의 확립: 1920~1933년
제2기는 일제가 제1차 산미증식계획을 시행한 1920년부터 제2차 산미증식계획이 공식적으로 종료된 1933년까지.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지주의 배타적 토지 소유권을 보장해 쌀의 대일 이출을 확대하려고 했지만 계획대로 진행하지는 못했다.(522) ··· 일본 자본주의의 급속한 ㅂ라전은 농업과 공업의 불균형을 심화시켰고, 물가조정령, 쌀 수출 금지, 대규모 미국의 수이입 등 일본 정부의 저미가 정책에도 고미가라는 가격구조는 변하지 않았다. 결국 1918년 8월에는 일본에서 ‘쌀 소동’이 발생했다.(523) 쌀 소동은 데라우치 내각을 실각시키고 하라 타카시의 정우회 내각을 출범시켜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를 열 만큼 일본 열도에 큰 충격을 주었다.(*쌀 수입 규모 폭증 - 국제수지 악화) 저렴한 노동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저미가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일제는 1919년부터 개간조성법, 경지정리법 등 증미장려정책을 실시했고 1920년부터는 조선에서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게 된다. 일제는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식민지 조선을 일본 자본주의를 위한 식량 공급기지로 전환하기 위한 정책을 본격화한 것이다.
하지만 제1차 산미증식계획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제2차 산미증식계획에서는 지주에게 저리의 자금을 융자해주고 토지개량사업을 수행할 대행기관을 설치해 문제를 해소하려고 했다.(524) ··· 조선인 지주들은 식민지 지배기관의 지원 아래 산미증식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조선인 지주들은 상품경제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정태적 지주들이 아니었다.(525)
문제는 산미증식계획으로 인해 증가한 산출량보다 더 많은 미곡이 일본으로 이출되었다는 점이다. 일본은 조선으로부터 대규모로 쌀을 이입함으로써 외국산 쌀의 수입을 감소시킬 수 있었고 국제수지도 개선할 수 있었다. 생산량보다 더 큰 이출량의 증가는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으로 만들어놓은 식민지 지주제를 전제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가 소비를 제외하고 남는 쌀을 대규모로 상품화할 수 있는 계급은 대지주를 제외하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대지주는 미곡의 이출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지만, 농업 이외에 별다른 탈출구가 없었던 대다수 농민들의 삶은 더 나빠졌다.
산미증식계획이 식민지 농업구조에 미친 영향은 1910년 이래 일제가 추진했던 식민지 지주제를 확대·강화하는 결과로 나타났다.(대지주 증가, 소작농 증가)(526) 산미증식계획으로 인해 조선 농업에서 식민지 지주제가 확산되었다. 이제 식민지 조선에서 지주는 출신 민족과 관계없이 미곡의 대일 이출이라는 상품화에 기초해 일본 자본주의와 공통의 이해를 갖게 되었다. 반면 조선의 소작농들은 식민지 지주제에 기초한 미국 상품화의 최대 희생자가 되었다.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식계획의 결과로 1920년대의 조선 민족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상이한 이해를 갖는 집단으로 분열되었다. 조선 농업이 일본으로의 이출을 위한 미곡을 중심으로 단작화되어감에 따라 조선은 일본 자본주의의 분업체계에 더 깊숙이 편입되었다.(527)
한편 김낙년은 산미증식계획의 결과로 나타난 식민지 지주에의 강화가 1930년대 공업화를 예비한 과정이었다고 평가했다. ··· 적어도 식민지 조선에서 지주의 성장은 지주자본이 산업자본으로 전환하기 위한 전조였던 것으로 보인다.(527)
하지만 일제는 1931년 만주침략 이전까지는 조선을 공업화할 어떤 계획도 갖고 있지 않았다. 1920년대까지 일제는 조선을 농업 식민지로 개발하기 위해 조선인의 자본을 토지에 묶어두려고 했고 이를 위한 제도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예: 조선지세령). 적어도 일제가 1931년 만주를 침략하기 전까지 토지는 조선에서 가장 안정적으로 이윤을 확보할 수 있는 투자처였다. 1930년대가 되어서야 공업에 대한 투자가 농업에 대한 투자보다 높은 수익을 보장해주기 시작했다. 산미증식계획으로 잉여를 축적한 지주자본이 1930년대의 조선공업화의 중요한 동력이 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1930년대의 공업화가 조선의 이해가 아닌 일본 제국주의의 이해에 따라 조선 산업을 일본 자본주의의 분업체계에 종속시키는 과정이었다는 점이다.(528)
3. 식민지 공업화
1930년대에 식민지 조선의 공업은 경이적인 성장을 했다. 급속한 공업화의 결과로 농업사회였던 식민지 조선은 1930년대 후반이 되면 공업생산액이 농업생산액을 앞지르게 된다. 조선 공업의 성장률은 당시 일본 광공업 분야의 성장률을 상회하는 수치였다. 제조업의 구성도 변화했다. 1930년대 이전까지 조선 제조업의 중심은 경공업이었으나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경공업의 비중이 낮아지고 화학을 중심으로 한 중공업의 비중이 높아지기 시작했다.(530)
1930년대의 공업화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일부 논자들이 1960년대 이후 한국의 급격한 경제성장의 기원을 1930년대에 이루어진 공업화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1930년대의 공업화의 의미를 설명하는 일은 과거를 다루는 것이 아닌 현재를 다루는 것이다.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가 일방적 수탈만이 아닌 개발을 동반했으며 식민주의자들이 (수탈을 위한) ‘간악한 의도를’ 가졌던 것이 아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오히려 식민지 정부의 정책이 독립 이후 제3세계의 경제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는 주장이다.(531) 사이먼 쿠즈네츠, 월트 로스토, 군나르 뮈르달 등. 브루스 커밍스, 애툴 콜리, 카터 에커트.
일제강점기의 공업화를 1960년대 이후 한국의 고도성장의 기원으로 보는 입장은 기본적으로 나카무라의 입론을 따른다. 나카무라의 핵심 주장은 일제가 시행한 1910년대의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근대적 소유권을 확립하고 1920년대의 산미증식계획을 통해 조선에서 원시적 자본축적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사업과 계획을 통해 이루어진 원시적 자본축적은 조선 내부에서 공산품에 대한 수요를 증대시켰고 (비록 일본 자본주의에 종속적이었지만) 1930년대의 조선 공업화를 견인했다는 것이다. 1930년대의 조선 공업화는 단순히 일본에서 이식된 것이 아니라 조선 내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도시화로 인한 수요 증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자는 결국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은 서구의 전형적 방식과는 상이한 식민지 자본주의화의 길이었고 현재 한국 자본주의 또한 일제강점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533) 더욱이 1930년대의 공업화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총독부라는 국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민간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강조함으로써 시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논리와도 연결시켰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1960년대에 시작된 한국의 산업화는 숙련과 기술이 분리되는 조립형 전략을 채택했고 시장이 아닌 국가에 의해 주도되었다.
실증적 자료를 구축한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일제강점기, 특히 1930년대 이후의 식민지 조선의 공업화에 대한 해석은 많은 논쟁을 야기했다. 이들 주장에 대한 몇 가지 비판 지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기간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이다. 하지만 1876년 조선의 개항이 일제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일제가 조선 자본주의의 이행을 강제한 시점은 187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렇게 보면 일제에 의한 조선의 산업화는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조선이 자본주의 세계체계에 편입된 지 60년이 넘은 1930년대 이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조선에서 공업화가 시작된 것이다. ‘조선산업혁명’이라고 하지만 호리 가즈오의 지적처럼 식민지 조선의 산업구조의 특성은 “강고한 지주제와 공업화로 이어지는 상품경제화의 과정이 병존”한 것이었다. 1930년대 들어서 농업 종사자의 빚우이 감소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전체 취업자 중 농업 종사자의 비중은 70~80%에 달했고 공업 종사자 비율은 5%에 불과했다. 더욱이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왜 일제가 조선의 공업화를 추진했는지를 묻지 않고 있다.
기타바 미치코의 지적처럼 “일본 통치 시대의 ‘개발’은 그 지역의 발전이나 주민의 복지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보면 식민지 조선의 공업화는 일본 경제를 보완하는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산미증식계획 및 공업화와 관련해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 간에 갈등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일본 제국을 위한 조선의 쓰임새를 둘러싼 시각 차이였지 조선총독부가 일본이 아닌 식민지 조선의 이해를 대변했다고 보기는 어렵다.(534) 고바야시 히데오가 정리한 바에 따르면, 일제가 1930년대에 조선의 공업화를 추진한 동인은 크게 네 가지였다. 첫째, 일제는 1929년을 전후한 공황에 대한 돌파구로 조선에 대한 투자가 필요했다. 둘째, 만주 침략과 중국 본토 침략 이후 대륙병참기지를 구축하기 위해 조선의 공업화가 요구되었다. 셋째, 일본 자본의 입장에서 조선은 만주침략 이후 일본에서 시행되었던 중요산업통제법, 공장법 등을 벗어날 수 있는 도피처였다. 넷째, 일제가 자신의 필요에 의해 조선의 자원을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조선인 자본의 성장과 관련해서도 다른 해석이 충분히 가능하다. 평양 메리야스공장으로 대표되는 조선인 자본의 능동성도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한 대응에서 보듯이 일제의 물리력에 의존하지 않고는 존립 자체가 불가능했다. 대표적 민족자본으로 알려진 경성방직을 포함한 대부분의 조선인 자본도 일제 식민지 지배에 협력할 때만 생존할 수 있었다.
방법론적으로는 일제강점기의 발전과 유산을 주장하는 연구들이 대개 1940년까지만 연구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1940년대 이후 기간에 대한 분석이 공백으로 남아 있다. ··· 1940년대 조선 공업은 일본 공업이 그랬던 것처럼 몰락의 길을 가고 있었다. 1940년대 일제가 시행한 중소기업대책요강은 조선인 자본에 궤멸적 타격을 입혔다. 이로 인해 1940년대는 조선인 자본이 감소하고 조선인에 대한 노동 착취가 가중된 시기였다.(535) 그러므로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공업 발전이 이뤄졌다고 해도 1940년대에 벌어진 파국을 고려한다면 1930년대의 성취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536)
식민 통치가 독립 이후 식민 국가의 경제 발전에 긍정적 유산을 남겼다는 주장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소위 젠틀맨 자본주의는 당시 영국 자본주의가 산업자본주의에서 금융자본주의로 이행해 인도의 산업 발전과 영국 자본주의의 이해가 충돌하는 지점이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성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 자본주의는 태평양전쟁 전까지 한 번도 서구 자본주의의 헤게모니를 벗어난 적이 없었으며, 1945년 패망 직전까지 금융자본주의로 이행하지 못했다. 산업자본에 기초한 일본 자본주의의 특성상 식민지에서의 산업화는 반드시 일본 산업자본주의를 보완할 때만 성립 가능한 것이었다. 더 논쟁적인 점은 1960년대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의 기원을 1930년대의 식민지 공업화에서 찾는다는 것은 해방 이후 한국 근대화의 주체가 일제에 협력한 식민지 조선 자본이라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한국이라는 국민국가의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일제강점기의 한국 자본주의의 변화에 대한 객관적 고찰이다. 동시에 그 변화를 “일제의 강점 때문에”가 아닌 “일제의 강점에도”라는 시각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536)
제4절 권력관계와 주체: 민족 대 계급
일제강점기의 권력관계를 다루는 이 절의 핵심 과제는 식민지 자본주의의 진전에 따라 분배를 중심으로 새롭게 형성된 권력관계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이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민족해방과 계급투쟁을 둘러싼 권력관계는 1945년 해방공간의 정치 지형을 이해하고 현재 한국 사회의 권력관계를 이해하는 출발이 된다. 현재 한국이 어떤 복지체제인가는 결국 누가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권력관계에서 지배적인 지위에 올랐고 이러한 지배적인 지위의 기원이 어디인가를 찾는 것이다.(537)
1. 일제 식민지 지배체제의 성립과 민족해방운동: 1910~1919년
일제강점기의 권력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제의 조선 지배 방식과 조선총독부의 성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조선 내 권력관계의 규칙을 만드는 절대적 권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538) 일제의 조선 지배는 ‘직접 지배하는 점령형’에 해당한다. 일제가 물리력을 동원해 강압적 지배를 자행하고 일제강점기 후반에 ‘내선일체’ 등 동화주의 방식의 지배를 시행한 것은 ‘직접 지배 점령형’ 식민지의 전형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조선 지배의 궁극적 목적은 조선을 “마치 시코쿠, 규슈와 같은 모양을 띠는 지역으로 도달케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539)
직접 지배 점령형 식민지 조선의 최고 권력기관인 조선총독부. 조선 점령 이후 일부 형식적 변화가 있었지만 조선 총독은 일본 내각이 아닌 일본 국왕에게 직접 책임을 지는 직예로, 형식적으로 총리대신을 경유하지만 국왕에게 직접 보고할 수 있는 내각총리와 대등한 권한을 가졌다. 법제도적으로 일본 내각은 식민지 조선의 통치에 대한 권한이 없었다. 조선 총독은 전제군주와 같이 조선에 대한 입법권, 사법권, 군권, 행정권 등 거의 모든 권한을 갖고 있었다. 1942년 전시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조선총독부를 형식적으로 일본 내각의 감독하에 두었을 뿐이다. 조선총독부의 이러한 특수성은 일제의 조선 침탈이 경제적 이유가 아닌 정치군사적인 목적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방증한다. 일본은 대륙으로부터 일본 본토의 안위를 위협하는 긴급한 위험에 대해 신속하게 정치적·군사적 대응을 하기 위해 조선총독부에 이러한 권한을 부여했다. 이를 근거로 김낙년은 식민지 조선에 대한 최고 결정권은 일본 정부가 아닌 조선총독부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김낙년의 주장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하나는 조선총독부는 기본적으로 본국의 이해에 복무하지만 조선총독부가 갖는 특수한 지위로 인해 경우에 따라서 본국의 이해에 반해 식민지 조선의 이해를 대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조선총독부의 자율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김낙년의 해석은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발전을 위해 토지조사사업, 산미증식계획, 1930년대 이후의 공업화 등을 추진한 측면도 있다는 해석의 여지를 준다.(540) ··· 조선총독부가 일본 중앙정부에 대해 상대적 자율성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에 근거해 김낙년은 “식민지기 한국 경제는 독립국가의 국민경제는 아니지만 하나의 경제 단위로 다룬다. 여기서 말하는 한국 경제는 민족 개념이 아니라 지역 개념으로 파악한다.”고 했다. 국민국가가 아닌데 국민국가의 경제를 다루는 것처럼 하나의 경제 단위로 분석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더욱이 국민경제라는 것이 'national economy(국민경제 또는 민족경제‘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식민지 조선 경제를 일본과 분리된 독립적인 자율성을 갖는 단위로 볼 수는 없다.(541)
다른 하나는 전제적 권한을 가진 것으로 그려지는 조선총독부의 존재는 일제강점 이전의 허약하고 무능한 조선 봉건정부의 ‘정체’와 비교되는 식민지 조선의 ‘놀라운’ 성장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조선인의 일상까지도 통제하고 동원할 수 있었던 효율적이고 강력한 조선총독부의 지배하에서 이루어진 일제강점기의 경제성장은 1960년대 이후 박정희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이루어진 한국경제의 ‘놀라운’ 고도성장의 모습과 겹쳐진다. 이러한 서술은 1930년대 이후의 공업화가 그러했듯이 1960년대의 개발을 위한 (바람직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권위주의 정권의 불가피성을 이야기하고 싶은 ‘복선’으로 읽힐 수도 있다. 전제적 권한과 물리력을 가진 조선총독부의 지배는 친일세력에게 일방적으로 우호적인 권력관계를 만들었다.(541) 특히 1910년대에 일제가 추진한 토지조사사업은 농민의 경작권을 합법적으로 박탈하고 지주의 배타적 토지 소유권을 보장했다는 점에서 식민지 조선에서 일제에 우호적인 식민지 지주계급과 이에 적대적인 광범위한 농민계층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강점 초기에 일제가 식민지 지주계급에 우호적 지원을 한 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식량 공급지로 조선을 재편하기 위한 경제적 목적에 한정된 조치였다. 일제는 조선을 강제로 병탄한 이후 조선의 구지배층 대부분을 식민지 중앙권력에서 배제한 것은 물론이고 지방 단위에서도 전통적 향촌 지배층을 지방권력으로부터 배제했다. 더욱이 일제는 회사령을 공포해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성장하고 있던 조선의 산업 발전을 제약함으로써 조선 부르주아 계급의 형성을 억제했다.(542)
조선의 구지배층을 배제하는 일제의 지배정책은 조선인이 계급과 계층의 차이를 넘어 피압박민족으로 1919년 3월 1일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정치경제적 조건을 만들었다. 1910년대에도 지주와 소작농의 대립과 자본계급에 대한 노동계급의 계급투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1910년대의 식민지 조선의 핵심모순은 계급모순보다는 민족모순으로 나타났다. 더욱이 1917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한 레닌이 1918년 피압박 민족에 대한 민족자결원칙을 선언하고 이에 대응해 1919년 1월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원칙이 선언되면서 식민지 조선의 권력관계는 일제 대 조선 민족의 구도로 전개되었다. 3·1독립운동에 다양한 계급과 계층이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1910년대의 국제정세와 식민지 조선의 상항과 관련이 있다. 다만 국내에서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을 지향했던 민족주의 운동은 1918년 대한광복회에 대한 일제의 검거가 진행되면서 모두 와해되었다.
민중운동은 개별적인 생존권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지만 아직 조직된 주체로 등장하지 못했다. 특히 공장노동자로 대표되는 근대적 노동계급은 여전히 소수에 머물렀다. 하지만 노동계급의 투쟁 역량은 강화되고 있었다.(543) ··· 조선 노동자들의 투쟁역량은 1918년을 기점으로 양적·질적으로 성장했다. 이후 1920년대에 들어서면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 경합하는 권력관계가 만들어지게 된다.(544)
2. 이행기: 민족 문제에서 계급 문제로, 1920년대~1930년대 초
3·1독립운동은 식ㅁ니지 조선의 권력관계에 결정적 변화를 초래했다. 3·1독립운동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 민족해방운동의 주도권은 우파 민족주의에서 좌파민족주의, 민중(노동자와 농민), 사회주의 세력으로 이동한다. 이러한 이동으로 계급모순(지주 대 소작농, 자본계급 대 노동계급)은 민족모순(일제 대 조선인)과 함께 식민지 조선의 권력관계의 핵심으로 등장하게 된다.(544)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의 권력관계는 중층적이고 복잡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더욱이 민족주의 세력이 해외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사회주의 세력이 코민테른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면서 권력관계는 국제적 양상을 띠게 된다.
1920년대의 권력관계가 1910년대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 것은 일제가 1910년대에 시행한 토지조사사업과 1920년대에 시행한 산미증식계획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토지조사사업은 배타적 소유권에 기초한 식민지 지주계급을 공고화한 반면 토지에 대한 경작권을 상실한 소작농을 대규모로 양산했다.(545) 이러한 변화는 조선 후기에 총액제라는 부세수취구조에 의해 형성된 ‘봉건국가(지방관) 대 (중소지주를 포함한) 농민’의 대립관계를 ‘지주 대 농민(소작농’의 관계로 전환한 것이다. 특히 주목해야 할 양상은 배타적 소유권을 보장받고 미곡의 일본 이출을 통해 상업농으로 성장한 조선인 지주들과 일제 간에 지배연합이 형성되었고 대다수 소작농이 일제-지주(조선인>일본인)연합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등장했다는 점이다. 1910년대에는 민족주의 좌우 세력은 물론 전 계층과 계급을 포괄한 민족주의운동이 3·1독립운동으로 분출되었지만, 1920년대에 들어서면 일제의 조선 지배를 둘러싸고 조선 민족 내부에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대다수 농민들에게 민족해방은 보다 더 나은 삶을 의미했지만, 식민지 지주들에게 민족해방이란 지주들이 일제로부터 보장·보호받았던 특권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대다수 지주가 대일 미곡 이출을 통해 농업 이윤을 보장받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식민지 지주계급이 민족해방운동으로부터 이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546)
지주와 농민의 분열은 1905년 이래 일제가 조선의 농업을 식민지 농업으로 재편하는 과정에서 누적된 모순이 표면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10년에 시작해 1918년에 완료된 토지조사사업과 1920년에 시작된 산미증식계획으로 소수 지주를 제외한 모든 농민계층이 몰락해가는 양상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경작권을 상실한 농민들의 소작농화가 확산되면서 1920년대의 농업 현장에서는 격렬한 소작쟁의가 빈번하게 발생했다.(546) 농민들의 투쟁은 소작권에 대한 요구에 그치지 않았다. 일제의 농업정책에 대한 반대투쟁도 전개되었다.
권력관계의 측면에서 중요한 사실은 지주와 일제의 식민지 지배연합에 대한 농민들의 투쟁이 우발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당시 『조선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소작쟁의가 지속된 지역에는 반드시 소작인조합, 소작인대표자회, 작인동맹 등이 조직되어 있었다고 한다. 농민들이 일제가 강제한 식민지 지주제에 저항하는 조직된 주체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 일본 자본주의의 과제는 1차 세계대전 기간에 급격히 성장한 자본의 투자처를 찾는 것이었다. 그 대안 중 하나가 유휴자본을 식민지로 재배치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조선에서 발생한 3·1독립운동에 조선인 전체가 참여했다는 사실에 일제는 당황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는 1910년 조선의 공업 발전을 막고 조선을 일본의 식량기지로 고착화하기 위해 제정했던 회사령을 폐지하게 된다. 일제는 일본 자본주의의 이해에 반하지 않는 선에서 식민지 조선의 공업화를 수용함으로써 일본의 유휴자본의 출구를 마련하려고 했다. 동시에 일제는 공업 부문으로 진출하려는 조선 부르주아의 이해를 일정 수준에서 충족시켜줌으로써 조선인 지주와 함께 조선인 부르주아를 일제에 우호적인 세력으로 전환시켰다.
변화된 상황에 대한 이해는 1920년대 한국의 노동계급과 자본계급의 성격을 이해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아직 그 규모가 농민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적었지만 노동계급의 성장도 주목할 만하다.(547) 1920년대에 노동자의 수가 증가하기 시작하면서 노동단체들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특히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노동계급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고 있었다. 1920년 33개에 불과했던 노동단체는 1930년이 되면 561개로 증가했다. 노동단체의 질적 변화도 목격된다. 1920년대 초만 하더라도 노동 문제의 대부분이 소작농민과 관련된 것들이었고, 임금노동자와 소작농이 동일한 노동단체에 가입해 있었다. 이념적으로도 당시 노동운동은 1910년대 민족주의운동의 주류를 형성했던 ‘실력양성운동’의 영향력하에 있었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듯이 1920년에 결성된 ‘조선노동공제회’와 1922년 9월에 평양에서 결성된 조선노동동맹회, 서울, 대구 등에서 결성된 노동조직들에게는 모두 해당 지역 유지들과 민족주의자들이 대거 참여했다. 하지만 노동자의 수와 의식이 성장하면서 노동단체는 점차 노동자 중심으로 전환되어갔다. 조직 구성의 변화는 노동단체(조직)의 강령에도 나타났다. 민족주의 우파의 실력양성론에 영향을 받은 근검, 절약, 위생 등이 강령에서 사라지고 ‘8시간 노동제의 확립, 최저임금제의 설정, 동일노동 동일임금’ 노동계급의 이해를 반영하는 내용의 강령으로 변화해갔다.(548)
노동조직의 형태도 처음의 직업별 노동조합에서 1926~1927년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전환되어 1928년 6월 10일 서울의 인쇄출판업 노동자들이 최초의 산별노조를 출범시켰다. 노동자들의 조직은 1921년부터 1935년까지 584건의 파업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고, 이중 명확히 노동단체가 지도한 파업이 대략 20% 내외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548)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한 자본가들의 대응은 기본적으로 일제의 경찰력에 의존해 파업을 무력화하는 것이었다. 일제 당국은 노동자들의 파업을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으로 몰아가려고 했다.(549)
노동단체의 질적 성장은 1920년대 사회주의 사상의 확산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1920년대 사회주의 사상이 확산되면서 노동계급은 농민과 구분되는 독자성을 강조했고, 노동조직은 노동계급의 독자적 조직으로 분화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가 민족주의를 대신해 노동운동의 주류 이념으로 등장한 것도 1920년대다. 사회주의 사상이 식민지 조선에서 노동운동을 주도하는 이념이 되면서 노동운동의 방향 또한 일제와 자본주의 체제에 반대하는 반제 민족해방으로 전환되었다. 특히 1925년 일제가 국내의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제정한 치안유지법을 조선에 적용하면서 반공을 명분으로 한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전면화되었다. 권력관계가 부르주아와 일제 연합에 대항하는 노동계급으로 구조화되었다.
노동계급의 성장은 산업부르주아의 성장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1920년대는 한국 부르주아의 기원이 되는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커밍스는 1920년대에 형성된 한국 기업가들이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일본 제국주의 보호하에 식민지 조선에서 일인과 조선인 자본가의 이해가 일치되는 방향으로 자본주의가 확대되어갔다. 조선인 자본은 일인 자본에 비해 차별받는다는 불평을 끊임없이 제기했고 조선 내에서의 특혜를 요구했지만 기본적으로 식민지 조선에서 자본가의 출신 민족은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았다. ··· 1920년대부터 권력관계가 부르주아지와 일제 연합에 대항하는 노동계급으로 구조화되었던 것이다.(550)
1920년대 이후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이념적으로 지도했던 사회주의운동. 사회주의 이념이 조선에 유입된 시점은 한국 좌파 운동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1920년대라는 시점이 갖는 중요성이다. 1920년대는 1917년 사회주의 혁명으로 러시아에서 전제정권이 무너지고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 성립된 이후이다. 당시 식민지 조선 지식인들에게 사회주의는 상상의 세계가 아닌 현실적 대안으로 받아들여졌다. 더욱이 레닌이 혁명 직후인 1918년 피압박 민족의 해방을 약속함으로써 사회주의 러시아는 조선과 같은 피압박 민족의 희망이 되었다. 외교로 조선의 독립을 보장받으려고 했던 민족주의자의 시도가 아무런 성과 없이 좌절되면서 사회주의는 조선의 민족해방을 위한 현실적 대안이 되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점은 유럽에서 사회주의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을 기점으로 개혁적 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공산주의)로 분화되었지만, 조선에 유입된 사회주의는 혁명적 사회주의 노선이었다는 점이다. 조선에서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노선은 반자본주의적이고 혁명적인 노선이었다. 특히 제3세계 공산주의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코민테른 창설의 핵심 목적 중 하나가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의 기만성을 폭로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코민테른의 강력한 영향력하에 있었던 조선의 사회주의운동에는 개혁적 사회주의인 사회민주주의가 자리할 정치적 공간이 없었을 것이다.(551) 이는 식민지 조선에서 사회주의운동의 목적이 개혁을 통한 민중의 복지 증진이 아닌 반제국주의 투쟁을 통해 일제와 자본주의의 모순을 혁명적으로 일거에 척결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사민주의는 현실 자본주의 체제 내의 타협을 전제하는데, 조선과 같은 식민지 상황에서 체제 내 타협이란 일제와의 타협을 의미했고 이는 개량주의적 우파를 제외한 어떤 민족해방그룹도 받아들일 수 없는 전제였다.(552)
마지막으로, 1920년대 당시 국제공산주의운동이 식민지 조선의 민족해방운동에 미친 영향이다. 식민지 경제의 변화와 맞물리면서 사회주의의 유입은 식민지 조선의 핵심모순을 둘러싼 사회주의 계열 내부의 논쟁을 야기했다. 연해주에서 이동휘를 중심으로 결성된 한인사회당(이후 고려공산당)에 뿌리를 두고 있는 상해파는 민족해방을 우선시하는 사회주의 노선을 취했다. 반면 소련 이르쿠츠크 지역 공산당의 산하조직이었던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은 민족해방보다 사회주의 혁명을 우선시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후 이르쿠츠크파는 여운형, 박헌영 등을 중심으로 하는 소위 화요파로 계승되고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에 중심적 역할을 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조선 사회주의자들의 노선 투쟁이 코민테른이 주도하는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는 점이다. 더불어 민족해방운동에 있어 부르주아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중요한 노선 갈등도 있었다. 반식민지였던 중국 민족해방운동에서 제기되었던 민족자본 개념이 완전한 식민지였던 조선에 무비판적으로 적용됨으로써 실천적 혼란이 야기되기도 했다. 사회주의자들이 신간회 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도 중국에서의 국공합작과 같은 반제통일전선을 조선에서 결성하라는 코민테른의 지도에 따른 것이었다.(552)
1927년 장개석의 쿠데타로 중국에서 국공합작이 명백히 실패했음에도, 코민테른은 반식민지였던 중국의 특수성에서 도출된 민족자본이라는 개념에 입각해 조선에서 민족부르주아와 반제민족해방을 위한 연합전선을 결성할 것을 지시했다. 미야지마 히로시는 자본이 일제와 협력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식민지에서는 민족자본 개념이 성립할 수 없으며 식민지에서 부르주아는 민족해방운동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했다. 결국 코민테른은 1928년 소련 낵 ᅟᅯᆫ력투쟁에서 승리한 이오시프 스탈린이 주도한 제6차 대회에서 ‘12월 테제’로 알려진 좌경화된 테제(식민지와 반식민지 제국에 있어서 혁명운동에 관한 테제)를 채택한다. 12월 테제는 민족부르주아와의 연대 대신 노동자, 농민, 빈민 등 기층 민중 중심으로 사회주의운동의 방향을 전환했다. 코민테른의 결정은 국내에서 신간회의 해소로 나타났다.(553)
더욱이 코민테른의 12월 테제는 분파 투쟁을 이유로 조선공산당을 재조직화할 것을 지시해 실질적으로 조선공산당을 해산시켰다. 하지만 코민테른의 운동 방향은 유럽과 동아시아에서 파시즘과 군국주의가 출현하면서 다시 반제통일전선을 결성하는 것으로 복귀한다. 이처럼 1920년대 이후 조선의 사회주의운동은 국제공산주의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국제공산주의운동과의 연계가 조선 사회주의자들에게 조선 민중의 실천적 요구보다 코민테른의 지시에 더 적극적으로 반응하게 했다는 점이다. 복지체제의 관점에서 보면 코민테른의 영향은 조선 사회주의운동에서 서구 복지국가의 개혁적 사회주의(사민주의)의 정치적 입지를 매우 취약하게 만들었던 것이다.(554)
3. 노동계급의 형성과 좌파 사회주의 민족해방투쟁
1927년 2월부터 1931년 5월까지 3ㅐ략 4년여 동안 존속했던 ‘민족협동전선론’의 산물이었던 신간회의 해체는 1930년대 이후 조선 내의 권력관계가 어떤 양상으로 변화했는지를 이야기해주고 있다. 사회주의 계열은 12월 테제의 지침에 따라 기층 민중운동을 강화하고 조직된 기층 민중(적색노동조합과 적색농업조합)을 기반으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려고 했다. 반면 민족주의 좌파는 소위 ‘당면이익 획득’을 주장하며 일제 지배체제 내에서의 개량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이로써 민족주의 세력은 민족해방운동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된다.
1929년 대공황의 촉발로 조성된 국제정세는 유럽과 일본에서 파시즘의 대두로 나타났다.(554) 파시즘은 대내적으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대외적으로는 식민지 쟁탈을 위한 침략전쟁을 감행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는 식민지 조선 내의 권력관계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코민테른도 1928년 제6차 대회의 좌경화노선을 폐기하고 1935년 제7차 대회에서 파시즘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의 연합전선을 구축하기 위한 ‘인민전선’을 반파시즘 운동의 핵심 노선으로 채택했다. 제6차 대회에서 결정된 사민주의와 민족주의 세력에 대한 적대노선을 폐기한 것이다. 이에 따라 노동자와 농민을 중심으로 반제민족해방투쟁에 집중했던 사회주의 계열은 다시 광범위한 반제통일전선을 구축할 것을 선언한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이 해체된 상황에서 반제통일전선운동을 통일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당시 사회주의운동의 조직 노선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났는데, 하나는 기존의 사회주의 운동조직인 적색노조와 농민조합을 반일 대중운동조직과 병행시키는 전략이고, 다른 하나는 적색노조와 농민조합을 해소하고 항일 대중조직을 강화하는 노선이었다. 특히 적색노조와 농민조합을 해체하고 대중조직을 강화하려는 전술은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조선에 전시동원체제가 구축되면서 조선 민중의 항일 감정이 급격히 높아진 당시의 객관적 정세에 기초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회주의운동은 조선 민중의 정서와 괴리된 좌경적 편향을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노동자, 농민, 민족 부르주아 등 일제의 지배에 반대하는 광범위한 대중을 반제민족해방운동에 집결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 지배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비타협적 투쟁이 일제와 협력한 민족주의 우파와 개량주의로 전환한 민족주의 좌파와 비교됨으로써 사회주의 계열은 이후 조선독립운동에서 정치적·도덕적 권위와 함께 조선 민중으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획득하게 된다.(555)
물론 일제가 물리력과 비강제적 방식(지주와 자본가계급에 경제적 이익을 보장하는 방식)을 통해 1945년 패망 직전까지 조선에 대한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일제는 패망 직전까지 대규 억압기구(군경)를 보유하고 있었다. 강력한 억압기구와 분열된 민족 앞에서 어떤 정치세력도 일제의 지배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는 효과적인 투쟁을 전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더욱이 민족 부르주아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코멘테른의 제7차 대회의 결정 사항인 “부르주아와 연합해 반파쇼인민전선을 결성하라.”는 새로운 요구는 식민지 조선에서 아무런 실천적 의미를 갖지 못했다.(556)
1930년대 이후 노동계급의 양적 성장은 일제의 점증하는 탄압으로 합법적인 조직 역량의 성숙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1936년 2월 26일에 발생한 일본 육군 황도파 장교들의 쿠데타를 계기로 군부가 일본 정계를 장악하면서 일본은 본격적인 군국주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탄압이 거세지면서 노동자들의 투쟁 방식은 파업보다는 태업을 이용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노동자 1인당 생산액은 137년부터 1943년까지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생산성의 감소가 모두 노동자들의 태업으로 인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일제가 생산력 증대를 위한 전시동원체제를 강제했음에도 노동생산성이 감소한 것은 노동자들의 저항에도 그 원인이 있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노동운동은 적색노조운동과 같은 비합법운동으로 전환되었고 노동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점점 더 가혹해졌다.(557) ··· 주·객관적인 상황으로 인해 사회주의 계열의 노동운동은 1930년대 중반 이후부터 1945년 일제 패망까지 전체 노동계급의 이해와 괴리된 전위적 활동에 국한되었다. 더욱이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도 전체 취업자 중 노동자의 비중은 매우 낮았다. 당시 조선은 농업 부문 종사자가 74.4%에 이르는 전형적인 농업 국가였다.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식계획을 통해 형성된 식민지 지주제는 1930년대 초의 농업공황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 농민들의 소작쟁의는 점차 폭동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당시 소작쟁의의 상당수가 농민단체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합법적 농민운동은 대중적 기반이 취약했고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을 연계하지도 못했다. 또한 식민지라는 정치경제적 조건을 잊고 농민들의 생활 이익에 매몰되는 한계를 드러냈다. 1932년경에 이르면 대부분의 합법 농민조합도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되었다. 일제는 ‘당면이익 획득운동’을 전개했던 체제 순응적·개량적 농민운동단체들도 해체시키거나 체제내화하려고 했다. 합법적 농민운동의 이러한 한계가 1930년대 이후의 혁명적(적색) 농민조합운동의 탄생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1930년대 중반 이후 조선 농민운동의 주도권은 사회주의 계열이 주도하는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으로 넘어갔다.(558) ··· 이 시기 사회주의운동은 만주와 조선의 경계지대와 함경도 지역에서 농민층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 혁명적 농민조합은 자신의 운동을 지속할 정도로 성숙된 조직적 역량을 갖고 있었고 국내 항일운동의 중요세력으로 성장했다. 농민운동은 당시 반제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또한 주목할 현상은 조선에서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연대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의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은 농민운동에 노동동맹의 혁명주의를 관철했고 농민들의 일상운동을 반제민족해방운동으로 연결시켜 농민을 민족해방운동의 주체로 세웠다. 하지만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은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이 그랬던 것처럼 좌경화의 오류를 범했다. 부농과 사민주의 계열의 조선농민사 등을 민족해방운동의 연대의 대상이 아니라 투쟁의 대상으로 간주한 것은 민족해방투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논란의 여지가 있는 노선이었다. 더불어 1930년대 중반 이후 농민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할 전국 조직이 해체된 상황에서 농민운동이 고립 분산적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던 것도 한계였다. 하지만 일제의 폭압에도 지속되었던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은 해방 정국에서 농민이 조직된 정치적 주체로 등장할 수 있게 만들었다.(560)
제5절 분배체계: 자족적 분배체계에서 자본주의적 분배체계로
1. 지주 중심의 분배체계의 구축: 1910~1919년
1) 농업생산물의 분배
지주의 성장과 농민의 양극분해는 일제강점기에 새롭게 나타난 현상은 아니다. 이미 조선 후기부터 지주의 토지 겸병이 증가하고 있었고 많은 농민들이 작인화되어 가고 있었다. 현상적으로 조선 후기 농촌의 모습은 1910년대 농촌의 모습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561) 그러나 복지체제의 관점에서 보면 이 두 시기에 농민은 근본적으로 상이한 지위를 갖고 있었다. 1910년대의 농민은 토지에 대한 경작권을 보유한 주체에서 토지에 대해 아무런 권리를 갖고 있지 않은 소작농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농민의 지위의 변화는 1910년대의 조선 복지체제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토지에 대한 권리를 상실한 농민과 배타적 소유권을 갖고 있는 지주의 농업생산물의 분배를 둘러싼 힘의 관계는 처음부터 지주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지주는 농업생산물의 분배와 관련해 소작인에 대해 결정적·구조적 힘의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더욱이 당시 농촌에는 농업생산에 필요한 노동력보다 더 많은 노동력이 존재했고, 식민권력 또한 지주를 정치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이러한 구조적 조건에서 지주는 부와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지만, 소작인은 하루하루 생존을 위한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다. 조선 후기 분배체계의 쟁점이 자족적 농업생산의 재생산과 농민의 소상품생산을 위한 분배체계를 둘러싼 것이었다면, 1910년대 일제강점기 분배체계의 쟁점은 지주의 압도적 힘의 우위에서 농민의 기본적 생존권을 보장하는 문제였다.(562)
일제는 1914년 조선지세령을 시행해 조선 후기 부세제도인 총액제를 폐지했고,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1918년에는 조선지세령을 개정해 토지의 수확량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는 조선의 전통적 부세방식인 결부제를 폐지하고 세금을 지세로 일원화했다. 세금이 지세로 일원화되었지만, 일제의 조세정책이 지주의 세부담을 늘린 것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의 세금의 특징은 토지에 부과되는 세금이 지나치게 낮았다는 점이다. 농업이 지배적인 산업이었던 조선에서 농업 소득에 세금을 부과한 것이 아니라 단위면적당 정률의 세금을 부과했다는 것은 조세체계 자체가 대토지 소유주들에게 극히 유리하게 제도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562) 조선총독부가 조선에 대한 지배를 위해 많은 재원을 필요로 했고 일제의 패망 직전까지 일본에서 보충금을 지원받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낮고 역진적인 지세란 다른 세원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일제가 선택한 방법은 역진적 소비세를 확대하는 것이었다. 일제는 지주세력을 친일세력으로 포섭하기 위해 낮은 지세를 부과하는 대신 그 결손액을 소비세로 충당하는 방식으로 일반 조선 민중의 세금 부담을 높였다. 세금이 지세에서 소비세로 이전된 만큼 지주는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고 조선 민중의 삶은 그만큼 더 힘들어졌다. 토지조사사업을 통한 지세 개정은 식민지 조선에서는 지주에게 매우 유리했지만 대다수 농민들에게는 매우 불리한 분배체계가 만들어졌던 것이다.(563)
예로부터 전승되던 토지에 대한 권리를 상실한 농민은 지주에게 우호적인 세금 구조로 인해 한층 더 고통을 받았고, 이렇게 쌓인 분노가 3·1독립운동으로 촉발되었다. 농민들이 3·1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이유는 조선이 독립되면 일제가 만들어놓은 불합리한 제도가 폐지되고 농민들이 원하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1894년 갑오농민전쟁 이래 아래로부터 제기된 ‘농민적 토지개혁’이 있었다.(563) 1919년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발생한 지 불과 한 세대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고, 다수의 농민들은 갑오농민전쟁의 직·간접적 기억을 가슴에 담아두고 있었을 것이다. 일제가 주관한 3·1독립운동의 재판 기록을 보면, 조선의 민중은 민족해방을 자신들을 위한 새 세상이 열리는 것과 동일시했다. 민중은 민족해방이 곧 부와 토지가 균등하게 분배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 당시 일부 조선 민중의 분배 요구는 조선 사회의 근본적 변화와 연관되어 있었다(사회주의).(564)
2) 노동시장에서의 분배
임금노동자와 관련된 가장 큰 쟁점은 출신 민족에 따라 차별적 임금이 적용되고 있었다는 점과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지속적으로 낮아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낮은 임금에도 노동시간은 살인적이었다.(564) 1912년부터 1919년까지 발생한 170건의 파업 중 임금 문제가 주요 원인이었던 경우가 87.6%였다. 1910년대는 일제가 헌병경찰제를 운영하며 무단통치를 행했던 엄혹한 시절이었음에도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선 것은 그만큼 노동자들의 생존 문제가 절박했기 때문이었다. 물가 상승도 민중의 삶을 어렵게 하는 주범이었다.(565)
3) 제도로서의 복지
추정치이기는 하지만, 1913년부터 1918년 3·1독립운동 직전까지 조선 내 총생산액 대비 조선총독부의 복지(보건, 사회보장, 복지 등) 관련 지출 비중은 0.08%~0.17%를 넘지 않았다. 조선총독부의 복지 관련 지출은 일제가 3·1독립운동으로 표출된 조선 민중의 독립 열망에 놀란 1919년이 되어서야 조금 증가했다. 1910년대를 대표할 수 있는 복지정책은 주로 임시은사금과 은사금에 의해 집행되는 매우 잔여적이고 시혜적인 정책들이었다. 임시음사금은 1910년 8월 일본 국왕의 명령인 ‘조선임시은사금제’에 따라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기명식 국공채였다. 조선총독부는 채권을 발행해 마련한 재원의 이자를 사용해 복지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임시은사금은 1910년부터 1943년까지 조선총독부의 가장 중요한 복지 재원으로 활용되었다.(566)
1944년 조선구호령이 제정되기 전까지 시민지 조선의 빈민행정은 주로 1916년 제정된 임시은사금 사용에 관한 ‘은사진휼자금 관리규칙’과 ‘은사진휼자금 궁민구조규정’에 의해 운영되었다. 빈민을 관리하는 이러한 규정들은 일제가 메이지 시대에 제정한 구휼규칙이라는 궁민구조규정의 자격 요건을 다소 완화한 전근대적 빈민구제제도였다. 구호도 원외구호를 원칙으로 하며 열등처우 원칙이 적용되었다. 행려병자에 대한 구호제도도 임시은사금의 이자로 운영되었다. 사회서비스는 주로 총독부가 민간의 참여를 장려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예외적으로 총독부가 고아 등 일부 아동과 일부 장애인을 위한 재생원을 운영하거나 형기를 마친 자에 대한 감화사업을 실시했다. 은사금은 일본 왕실에서 직접 비용을 출현하는 경우로 ‘은사이재구조기금’, ‘구휼어하사금’ 등이라고 해서 이재민과 극빈층을 구제하는 데 사용되었고 부족한 금액은 국고에서 보조했다.(568) 하지만 구휼어하사금은 금액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재원이 마련된다는 보장도 없는 일제의 편의에 따라 조성되어 집행되는 매우 일회적인 재원에 불과했다. 사회보험은 일부 군인, 총독부 관리, 유족 등에 대한 연금과 부조가 제도화되기는 했지만 대상자는 극소수였다. 일제가 조선인의 강력한 저항에도 강제로 조선을 병탄하면서 그 명분으로 내세웠던 것이 “한국 민중의 복지를 증진함과 동시에 정신적 동화를 시도하여 내선일체를 고양”한다는 주장을 무색하게 했다. 일제는 복지를 통해 조선 민중의 분배 요구를 충족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569)
2. 지주 중심의 분배체계의 동요기: 1920~1933년
1) 농업생산에서의 분배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초까지는 조선이 본격적으로 일본 자본주의의 주변부로 편입되던 시기다. 농촌에서는 소작쟁의가 빈발했고, 회사령 철폐로 상대적으로 투자가 자유로워진 공업 분야에서 노동자들이 증가했다. 이를 반영하듯이 노동자와 농민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조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들을 중심으로 분배 요구가 표출되기 시작했다. 농민들의 분배 요구는 소작쟁의로 표출되었다. 소작쟁의는 1920년 15건에 불과했던 것이 1928년이 되면 1,590건으로 폭증했다. 참여 인원도 1920년 4,040명에서 1930년 13,012명으로 증가했다. 소작쟁의는 우발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농민조직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1920년대에는 농민들이 조직된 주체 역량을 바탕으로 분배와 관련된 자신들의 요구를 분출했던 것으로 보인다.(569) 소작쟁의의 발생 원인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소작권의 빈번한 이동에 대한 저항이다. 다른 하나는 지주에게 지불해야 하는 소작료와 지주가 소작인에게 부담시켰던 각종 비용이다. ··· 소작쟁의의 원인은 반영구적으로 보장받았던 (소작)농민의 경작권이 지주의 ‘배타적 소유권’을 보장한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한시적 계약관계로 전환된 것 때문이었다.(570) ··· 이러한 악순환 구조가 반복적으로 나타났던 것이 1920년대와 1930년대 초반의 상황이었다. 여기에 1920년대부터 조선에 유입된 사회주의 사상이 결합되면서 소작쟁의는 농촌사회에서 사회가 생산한 부를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를 둘러싼 계급 대립 양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 1920년대와 1930년대 초의 소작쟁의의 근본 원인이 일제가 구조화한 식민지 지주제의 결과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소작쟁의를 지주와 소작인의 계급 문제만으로 볼 수는 없다. 당시 소작쟁의는 일제와 지주 연합이라는 식민권력에 대한 농민의 저항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소작쟁의는 분배를 둘러싼 항일·계급투쟁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상황이 점점 더 악화되면서 소작쟁의는 일제의 식민지 농업정책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수준으로 치닫고 있었다. 일제는 어떤 식으로든 개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일제는 식민지 지주제의 골간을 건드리지 않는 범위에서 소작농들의 불만을 완화할 필요가 있었다.(573)
··· 1930년대에 발생한 농업공황으로 조선의 농업은 거의 괴멸 직전에 있었고 소작쟁의가 더욱 격렬해지면서 계급투쟁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는 1931년 ‘조선소작조정령’을 공포했으며, 1933년에는 ‘소작위원회’를, 1934년에는 지주들의 반대에도 ‘조선농지령’을 공포했다. 조선농지령은 많은 문제를 내재하고 있었지만 지주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분배구조를 일부 개선했다. 조선농지령 이후 소작쟁의의 강도는 약화되고 참여 인원은 감소했다.(574) 소작쟁의로 나타난 농업생산물을 둘러싼 분배 투쟁에서 일제는 지주들에게 부분적 양보를 강제했지만 미곡의 상품화라는 자본이 지배하는 지주 중심의 식민지 농업구조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지는 않았다.(575)
2) 노동시장에서의 분배
노동자들도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파업을 통해 자신들의 요구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파업에서는 주로 임금 인하에 반대하거나 임금 인상을 요구했다. 노동운동은 임금과 관련된 투쟁에서 노동권 문제로 전환되는 양상을 보였다.(577) ··· 더욱이 1930년대 초의 공황은 분배를 둘러싼 노동자들의 요구에 불을 붙였다.(578) ··· 식민당국은 파업을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으로 인한 것으로 간주하고 자본의 편에 서서 철저히 탄압했다. 자본은 출신 민족과 관계없이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를 지키기 위해 일제와 협력했다. 이러한 조건에서 반식민지인 중국에서 논란이 되었던 민족자본은 식민지 조선에서는 존재하기 어려웠다. ··· 조선 자본은 민족의 이해보다는 계급 이해를 우선으로 했다.(579)
3) 제도로서의 복지
1920년대에도 분배제도로서 복지정책의 역할은 대단히 제한적이었다.(579) 이 시기 복지제도의 특성은 조선총독부가 사회교화사업의 일환으로 사회사업을 재편하려고 했던 점과 민간 중심의 사회사업이 확대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 인보관사업이 조선에 소개되어 일부 지역에서 구제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인보관이 건립되었다. 특히 총독부가 설립한 인보관은 일제가 식민지 지배체제를 선전하는 공간으로 이용되었다. 사회서비스 분야에서 주목할 점은 의료서비스 제공기관과 직업소개소의 건립 등을 들 수 있다.
방면위원회의 도입도 이 시기의 대표적인 사회복지제도로 언급되고 있다. 방면위원회는 지역의 친일 유지들로 구성된 민간위원들이 지역민들의 빈곤 실태를 파악하고 이에 근거해 빈곤에 대한 적절한 대응책을 연계해주는 역할을 했다. 조선에서 실시된 방면위원회는 지역민들의 빈곤 구제와 생활조건 개선을 위해서 설치된 것이 아니라 일제의 식민지배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되었다. 공공부조는 1910년대와 같이 임시은사금과 은사금을 통한 일회적이고 잔여적인 지원 형태에 머물렀다. 임시은사금 사용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변화는 1920년 1월에 임시은사금 관리규칙을 개정해 양잠과 제사 교육 등에 사용되던 비용의 일부를 지방에서 사회복지 관련 시설을 설립하는 데 사용할 수 있게 개정했다는 점이다.(580)
이 시기의 또 다른 특징은 총독부가 지원하는 다양한 민간 사회복지기관이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시설의 설치와 운영은 민간이 담당하고 운영비용은 총독부가 보조하는 방식의 사회복지기관들이 운영되었다. 현재 한국에서 운영되고 있는 사회복지서비스 기관들의 전형이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선교사들의 사회복지기관 설립 등도 이루어졌다. 선교사들이 설립한 기관들은 총독부로부터의 재정적 지원 없이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는 점에서 일제의 선전도구로 활용되었던 조선 내 다른 사회복지기관과는 차별성이 있었다. 하지만 이 또한 체제 옹호 대신 선교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극소수를 대상으로 사회보험과 유사한 은급법이 1923년에 시행되었다. 또한 국가가 주체가 되어 소액의 사보험을 운영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581)
이 시기에 조선 민중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농민들의 요구는 소작권의 안정적 확보와 적절한 소작료의 지불로 모아졌다. 임금노동자의 경우 고용주의 지속적인 임금 인하 압박에 맞서 실질임금을 유지하는 동시에 8시간 노동제와 같은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농지령을 제정한 것처럼 일제는 체제 유지를 위한 방편으로 소작농의 요구를 부분적으로 수용하는 데 그쳤다.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서는 반공을 명분으로 경찰력을 동원해 강제적으로 파업을 무력화함으로써 철저히 자본의 이해를 대변했다.(581) 1910년대와 비교해 미시적 사회복지정책의 변화는 총독부가 민간의 사회복지를 장려·지원하는 방향으로 사회서비스를 확대했다는 점이다. 현재 한국 사회서비스 전달체계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민간이 설립·운영하는 사회복지기관을 국가가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방식이 이미 1920년대의 일제강점기에 시작되었다. 공공부조와 관련해서는 방면위원제도를 경성부 차원에서 도입하는 정도에 그쳤다. 당시 걸식민, 궁민, 영세민을 포함한 빈곤층의 규모가 540여만 명에 달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일제가 구축한 분배체계로는 식민지 조선에 만연한 빈곤과 불평등을 완화하는 것이 불가능했다.(582)
3. 자본 중심의 분배체계로의 이행과 탈상품화 요구의 등장: 1934~1945년
1930년대의 농업공황은 조선에서 식민지 지주제의 동요를 야기했다. 일본 내 미곡 공급의 과잉으로 인해 조선에서 미곡의 대일 이출이 원활하지 않게 되었고 미곡과 누에고치 가격이 폭락했으며 농촌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더불어 소작쟁의의 격증으로 체제 위협을 느낀 일제가 각종 농가 경제 안정책을 추진하면서 식민지 지주제는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는 만주침략에 이은 중국 본토에 대한 침략을 감행하면서 조선을 대륙침략의 병참기지화하기 위해 조선의 공업화를 추진하게 된다. 1930년대 중반 이후의 조선 민중의 분배에 대한 요구는 이러한 국면에서 형성된 것이다.(582)
1) 농업생산물의 분배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격렬했던 소작쟁의는 조선농지령으로 대표되는 일제의 유화책으로 인해 소강상태에 접어들게 된다.(583) 소작농의 생존을 위협하는 식민지 지주제가 해체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확장되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 중반 이후 자소작농의 몰락과 소작농의 증가 현상은 목격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조선 농민들의 생활이 개선된 것은 아니었다. 전체 인구 중 빈민으로 분류되는 인구의 비율이 1934년 10월 1일 27.5%에 달해 조선인 4명 중 1명 이상이 절대빈곤상태에 놓여 있었다.(583)
복지체제는 여전히 지주에게 유리하게 제도화되어 있었다. 일제의 중국 침략과 태평양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일제의 물리적 탄압이 강화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농민들이 1920년대와 같이 소작쟁의를 통해 분배에 대한 자신들의 정당한 몫을 요구할 수 있는 정치적 여건 또한 여의치 않았을 것이다. 1930년대 이후에 나타난 비합법 농민운동인 혁명적 농업조합운동은 이러한 상황의 결과였다. 분배를 둘러싼 농민의 요구를 대변한 농민조직이 일제의 탄압으로 비합법화되면서 농민운동의 중심이 대중조직에서 혁명적 농조로 전환된 것이다. 이전 시기에 농민운동의 요구가 소작권, 소작료, 비용전가 등의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면, 혁명적 농업조합에 의해 주도된 농민운동의 요구는 ‘노농소비에트 건설을 통한 토지혁명’을 통해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과 민족해방투쟁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농민운동이 사회주의 세력과 결합하면서 농민운동조직의 요 구는 직접적인 분배를 둘러싼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정치적 이슈로 확장되었다. 혁명적 농조운동이 조선공산당 재건을 통한 반제투쟁과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정치투쟁으로 연계된 것이다. 3·1독립운동에 참여한 많은 농민들이 토지균산을 염원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혁명적 농조의 요구가 농민 대중의 이해와 유리된 좌편향적 요구였다고 평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만약 혁명적 농조의 요구가 좌편향적 요구였다고 평가한다면, 1945년 8월 해방 이후 농민들로부터 분출된 농지 개혁에 대한 요구와 사회주의에 대한 지지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혁명적 농업조합의 요구가 광범위한 농민 대중을 동원하지는 못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584)
2) 노동시장에서의 분배
임금노동자가 분배에 대한 자신의 요구를 조직화하고 동원할 수 있는 권력 자원은 1930년대의 조선의 산업화와 함께 확장되어갔다. 하지만 1937년 ㄴ이후 일제의 조선 지배 방식이 전시동원체제로 전환되면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합법적이고 공개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은 사라졌다. 농민운동과 같이 노동운동 또한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이라는 비합법화의 길을 걷게 된다. 혁명적 노조운동은 직접적 분배 요구와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정치적 조건을 만드는 요구를 병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40년대 파업의 원인은 여전히 임금과 관련된 것이 다수였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총독부가 1939년 10월에 공포한 ‘임금임시조치령’과 같은 임금통제정책으로 노동자들의 임금을 낮은 수준으로 유지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물가상승률을 반영한 노동자들의 임금은 전시체제하에서 지속적으로 낮아졌다.(585)
8시간 노동제로 대표되는 노동시간 감축도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중요한 요구 중 하나였다. ··· 이 시기의 임금노동과 관련된 분배정책의 특징은 자본주의적 분배체계에 대한 요구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 이를 현대적 시각에서 보면 임금노동의 탈상품화를 위한 제도적 지원을 요구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586) ··· 노동조건에 대한 요구들은 혁명적 노동조합과 항일운동세력이 노동운동의 좌편향과 결별하고 생산현장의 이해를 대변해 노동 대중에게 굳건히 뿌리내리기 위한 전략적 결정이었다. 코민테른은 식민지 조선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2단계 과정(선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 후 사회주의 혁명)을 거쳐 완수될 수 있다고 보았고, 8시간 노동제, 사회보험법 실시 등은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의 일환으로 간주되었다.(587)
3) 제도로서의 복지
사회복지를 현금과 서비스이전이라는 범주로 한정해보면, 이전 시기와 같이 이 시기에 일제가 구축한 사회복지제도는 조선 농민과 노동자들의 분배 요구와는 거리가 멀었다.(587) (*낮은 복지 지출)
복지제도와 관련된 변화는 지난 시기에 경성부에서 도입되었던 친일 민간인 중심의 방면위원제도가 1936년부터 확장·재편되었다는 점과 1944년 3월에 ‘조선구호령’이 공포되었다는 점이다. 방면위원회와 관련된 변화를 보면, 일본의 중국 본토 침략과 함께 방면위원제도의 대상이 변화했다. 기존의 방면위원회가 주로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으로 인한 빈곤자와 실업자를 대상으로 활동했다면, 일제의 중국 본토 침략 이후에는 그 대상이 군인 유가족을 포함한 전체 조선인으로 확대되어 전시생활을 지도한 것으로 나타났다. 방면위원회의 목적이 빈민 구제에서 전쟁 동원을 위한 후방활동으로 변화한 것이다.(588) 하지만 조선에서 실시한 방면위원회는 일본과 달리 전국적 제도가 아닌 지방 차원에서 실시한 제도였다. 다만 조선총독부는 조선에서 방면위원령 시행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자 1943년 2월에 조선에 방면위원령을 실시할 것을 결정했지만, 1945년 8월에 패망하기 전까지 방면위원령은 공포되지 않았다.(589)
조선구호령은 1932년 일본에서 실시했던 근대적 공공부조정책인 구호법을 근간으로 조선에서 실시되고 있던 모자보호법과 의료보호법의 일부 내용을 포괄하는 방식으로 조선에서 제도화된 근대적 성격의 공공부조와 가장 가까운 제도였다. 특히 조선구호령은 1963년 생활보호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한국 공공부조 제도의 근간이 되었다. 조선구호령에 명시한 수급과 운영 우너칙의 원형은 1999년에 제정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에도 남아 있다. ··· 공공부조의 원칙은 일제의 조선구호령만이 아닌 조선의 환곡과 서구의 공공부조 운영의 일반적 원칙이었다.(589) (*재해구조 - 589, 590)
이 기간 동안 사회복지정책에 몇 가지 제도적 변화와 확장이 있었지만, 문제는 이 시기에 들어서면 사회복지제도의 주된 목적이 침략전쟁이라는 일제의 비윤리적인 불법행위를 후방에서 지원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졌다는 점이다. ··· 1938년 일본 중앙정부에 후생성을 설치한 것과 조선총독부에 후생국을 설치한 것도 일제의 전시동원체제에서 사회복지정책이 갖는 의미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다. 일본에서 후생성의 설치는 사회복지행정에 군사적 목적을 결합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까지 조선 사회의 산업화과 진전되면서 분배 요구도 자본주의적 관계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혁명적 노조운동에 의해 주도된 노동운동은 임금에 대한 요구를 넘어 사회보험과 같은 탈상품화의 제도화를 요구하기 시작했다.(590) 소작쟁의로 대표되는 농민들의 분배 요구는 외형적으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지만, 농민운동은 합법적 농민조합운동에서 비합법적인 혁명적 농업조합운동으로 전환되면서 토지균분에 대한 요구로 나아갔다. 하지만 일제가 구축한 분배체계는 이러한 조선 민중의 분배 요구를 담아낼 수 없었다. 일제는 여전히 친일 지주와 자본의 이해를 대변했으며 사회복지제도에서는 잔여적 수준에서 소수의 극빈층에 대한 임시적 구호로 일관함으로써 조선 사회에 광범위하게 존재했던 빈곤과 불평등을 방임했다.(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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