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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것/복지국가, 사회정책

5장_한국 복지국가의 기원과 궤적 1 자본주의로의 이행의 시작 - 18세기부터 1945년까지

5장 사회민주주의 부상과 역사적 복지국가의 태동: 187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1절 문제제기

인간과 자연을 상품화하는 자기조정적 시장에 맞서 인간의 존엄과 자연의 숭고함을 지키려고 했던 사회주의자의 역사적 시도들이 사회민주주의라는 자본주의 체제 내의 개혁으로 수렴되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사회주의 혁명에서 사민주의 개혁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던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자본주의의 100년은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사회민주주의는 극우 전체주의(파시즘)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시작된 공산주의의 도전으로부터 살아남아야 했다. 단지 살아남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사민주의는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자신이 전복하고자 했던 자본주의의 지속적 발전을 자신의 힘으로 이뤄내야 했던 것은 물론 자본주의 내에서 사회주의가 추구했던 평등과 자유를 증진시켜야 했다. 사민주의는 어쩌면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달성해야 했다.(296)

1870년대를 전후한 시기부터 1940년대까지의 기간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복지국가의 중요한 사회·정치·경제적 토대가 형성된 시기였다. 복지국가를 만들어가는 주체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 시기(정확하게는 1875년부터 1914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까지의 시기)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복지국가의 황금기를 열었던 핵심 정치세력들이 자본주의 체제 내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때다. 복지국가의 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이 시기에 근대적 입법기구들의 형성과 함께 만들어지고 자신들의 권력자원을 확대했다. 실제로 유럽 국가들에서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들은 대부분 1871년부터 1905년 사이에 창당되었다.

19141차 세계대전 이전에 이미 사민당은 핀란드, 스웨덴, 독일의 총선에서 놀라운 득표율을 기록하고 있었다. 선거 결과는 엥겔스조차 사민당의 의회활동을 옹호하게 했던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297) 엥겔스는 의회선거와 같은 합법적 방식을 용인함으로써 이후 베른슈타인에 의해 촉발된 수정주의 논쟁, 사민주의라는 새로운 길을 여는 데 매우 중요한 이론적·실천적 단초를 제공했다.(298) 사민당이 복지국가를 만들어가는 핵심 주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사민당이 자본주의를 전복하려는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에서 자본주의를 개혁하려는 개혁적 사회주의 세력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한편 자본주의의 세계체계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시기는 영국 패권이 쇠퇴하고 새로운 패권 국가로서 미국이 부상한 때다. 가족기업을 근간으로 발전한 영국 자본주의는 1850년대와 1960년대의 호황에 이어 1873년부터 1896년까지 지속된 장기불황을 거치면서 위기에 직면한다. 장기불황의 과정에서 미국과 독일은 가족기업에 기반을 둔 영국 자본주의를 대신하는 법인기업을 발전시키며 영국 패권에 도전했다. 미국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독일을 제압하고 영국을 대신해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패권국가로 등장했다. 미국은 영국이 지향했던 자본과 상품의 자유무역 대신 국민국가에 의해 자본이 통제되는 국제교역체계를 구축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 이후 국민국가에 기초한 복지국가가 확대되는 중요한 조건을 창출한 것이다.

자본주의를 개혁하려는 사민주의 정치세력이 성장하고 자본주의가 자유방임주의에서 국민국가에 의해 통제되는 자본주의로 변화하자 분배체계에서도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자본주의 분배체계는 이 시기를 거치면서 빈민법 중심의 복지체제에서 산업자본주의의 생산양식과 생산관계에 조응하는 복지체제로 전환되었다. 산업화로 인해 농촌에서 밀려나온 유민과 잉여 노동력을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편입시키려고 했던 빈민법 체제로는 수직적·수평적 통합에 기반을 둔 미국과 독일의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대규모 노동계급의 재생산을 보장할 수 없었다.(299) 더욱이 노동계급은 대규모로 성장했고, 노동계급의 이해를 정치적으로 대변하는 사민당 또한 핵심적인 정치세력으로 부상했다. 현재 복지국가의 모습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역사적 결과물이다.(300)

복지체제의 성격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될 필요가 있다. 하나는 통상적으로 복지체제를 설명할 때 적용하는 방식으로, 복지체제를 탈상품화, 탈가족화, 상품화 등 복지제도의 기능적인 측면들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복지체제의 이러한 측면을 제도적 측면이라고 개념화했다. 다른 하나는 복지체제의 토대적 측면이라고 명명한 부분이다. 토대적 요소는 복지체제와 관련된 정치·경제적 측면을 포괄하는 것으로, 통상적으로 복지정치와 경제체제와 관련된다. 일반적으로 복지체제를 복지제도(정책 또는 프로그램)로 제한하는 경우가 있지만, 복지체제는 단순히 제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책으로서 복지제도는 정치·경제구조와 분리될 수 없다.(300)

 

2절 시기 구분: 187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187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의 시기를 구분하는 합의된 원칙은 없다. 다만 이 시기의 세 가지 측면(경제, 정치, 복지체제)을 검토해 시기를 구분하는 준거가 되는 시점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세 가지 측면은 경제적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성격을 구분하는 것과 정치적 관점에서 복지국가의 주체 형성과 관련해서 시기를 구분해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복지체제의 차원에서 시기를 구분해보는 것이다.(301)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이 시대를 구분하는 중요한 준거가 된다는 생각은 근현대사 연구자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던 것 같다.(302) ··· 정치적 측면에서도 1914년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 정치적으로 1차 세계대전은 네 가지 점에서 복지체제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다. 첫째, 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좌파(사회민주당)는 자본주의(부르주아) 국가에 대적했던 이전의 모습과 달리 자본주의 국가의 체제 내 세력이 된다. 실제로 1914년 이전에 유럽의 사회주의 정당들이 공식적으로 정부에 참여한 경우는 없었다. 더 나아가 1914년 이후 사회주의 정당(사민당)은 더 이상 자본주의를 전복하기 위한 혁명 정당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혁명 집단처럼 행동했다.(303)

둘째, 1차 세계대전 기간에 일어난 1917년 러시아 혁명(볼셰비즘)은 폭력 혁명으로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해 사민당과는 다른 사회주의의 길을 제시했다. 러시아혁명은 혁명주의자들에게는 긍정적 모델을 제시한 반면 사회주의자들과 같은 개혁주의자들에게는 부정적 모델을 제시했다.

셋째, 1914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국가의 역할은 자유방임시대의 야경국가에서 벗어나 생산, 소비, 분배 등 전방위로 확대된다. 국가 역할의 확대는 서구 복지국가의 기본 토대가 되는 국가-자본-노동이라는 새로운 조합주의 관계를 제도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1차 세계대전은 마르크스 이래 좌파의 가장 핵심적 원칙 중 하나인 국제주의가 폐기되고 좌파운동이 국민국가로 축소·고립되는 계기가 된다. 국제주의 해체의 결정적 계기는 1차 세계대전에 대한 제2인터내셔널의 무기력한 대응에서 비롯되었다.(304) ··· 사회주의 정당들이 제2인터내셔널의 결의에 반해 전쟁을 지지하자 노동계급의 국제연대는 무너졌다. 이후 주류 좌파는 국제적 차원의 노동해방이 아닌 국민국가 내에서 복지국가를 추구했다.

분배체계와 관련해서도 1914년은 중요한 분기점이다. 1차 세계대전은 이전까지 유럽에서 벌어졌던 전쟁들과 달리 국민국가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야 하는 총력전의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노동계급은 오랜 투쟁을 통해서 얻어낸 권리와 자유가 애국이라는 미명하에 축소되는 것을 감내해야 했다. 노동계급에 강제된 양보와 희생은 노동계급이 허구적인 계급평화 논리에서 벗어나 반전운동과 노동계급의 경제적·사회적·정치적 권리를 되찾기 위한 투쟁을 광범위하게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유럽에서는 반전과 민생에 대한 요구로 분출되었고, 3세계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들에서는 민족해방운동으로 분출되었다.(305)

1차 세계대전을 경과하면서 노동게급과 좌파정당의 요구는 단순히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축소에 그치지 않았다. 실업보험(급여)으로 대표되는 전면적 사회보장에 대한 요구로 확대되었다. 1차 세계대전을 경과하면서 자본주의 세계체계는 노동력의 강제적 상품화를 위해 제도화했던 빈민 통제정책과 구별되는, 상품화된 노동력을 탈상품화하는 사회보험과 같은 복지제도를 구체화하기 시작했다.(306) 1차 세계대전 이후에 본격적으로 확대된 남성 노동력의 탈상품화를 위한 사회보장제도는 1929년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이라는 또 하나의 총력전을거치면서 1940년대 이후 지금 알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1914년은 자본주의 복지체제의 성격이 질적으로 변화하는 중요한 분기점이었다.(307)

시기

경제체제의 특성

권력관계의 특성

복지체제의 특성

시장의 지배

1815~1914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와 자유무역의 시대와 보호주의의 태동

·2차 산업혁명과 운송기관의 혁명(증기선과 기차)

·대량 소비구조의 형성

·1873~1896 장기불황

·금본위제

·동아시아, 세계체계에 편입

·영국 패권의 시대(100년의 평화)

·자유주의 제국주의의 시대(영토제국주의의 시대)

·사회주의 운동의 대중화와 사회주의 정당의 출현

·보통선거권과 비례대표제

·야경국가의 시대

·대규모 노동계급의 형성과 조직화

·구빈민법 체제에서 신민법 체제로 전환

·강제적 상품화 제도로서 신빈민법

·전국적 빈민통제 제도의 확립

·사회보험의 등장

·보편주의 복지강령의 등장(1897년 스톡홀름 강령)

일본, 기업복지의 등장

국가의 등장

1914~1929

·1차 세계대전으로 자유방임적 자본주의 붕괴

·미국 자본주의 패권의 형성

·가족기업에서 주식회사로

·계획의 출현(독일의 전쟁계획경제, 소련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러시아 혁명으로 좌파의 분화(공산주의 대 사민주의)

·사회주의 국가 탄생

사민주의 대중 정당의 성장

·좌파의 국제주의 원칙 폐기

·동아시아에서 반제반봉건 민족해방운동의 등장

·중국에서 농민이 사회주의 혁명의 중심세력으로 등장

·사회보험의 확대기

·국가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담론 출현(적극적 복지의 제공자로서 국가)

·일본 공적 구호법과 사회보험의 제도화

·일본 기업복지의 확대

복지국가의 태동기

1929~1945

·1929년 대공황

·영국자본주의의 패권의 종말과 미국자본주의의 패권의 본격화

·보호주의의 가속화

·금본위제의 폐지

·전체주의의 등장과 사민주의 정당의 위기

·계급연대의 형성(스칸디나비아의 적녹동맹)

·노동과 자본의 타협(칸슬레르가데 협약, 암소거래, 쌀트세바덴협정, 기본협정)

·노동에 대한 새로운 포섭체계의 등장(역사적 복지국가의 출현)

·스웨덴 국민의 집

·취약계층이 배제된 사회보험

·사회협약을 통한 보편주의 복지국가의 토대 구축

 

 

3절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변화: 영국의 쇠퇴와 미국의 부상

영국은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인류 역사상 산업적 제조업이 경제를 지배하는 최초의 국가이자 유일한 국가가 되었고, 산업적 제조업에 기초해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패권을 장악한 최초의 자본주의 국가가 되었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자본의 구성에서 유동자본의 비중이 항상 고정자본의 비중보다 더 컸다. 하지만 영국 패권 시기인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자본주의는 고정자본의 비율이 유동자본의 비율을 압도하는 시대에 들어섰다. 생산에서 기계의 몫이 커지고 생산에서 발생하는 이윤이 유통에서 발생하는 이윤을 앞서는 시대가 비로소 열린 것이다.(307)

 

1. 자본주의 세계체계 패권의 이행

영국의 패권은 1780년대부터 런던이 암스테르담을 대신해 유럽 세계체계에서 제1의 금융 중심지가 되면서 시작되었다. 영국 패권은 네 단계를 거치면서 성립했다.(308-309) ··· 영국의 본격적인 경제 발전은 이 시기(1780년대)부터 시작되었고, 영국은 이때부터 유럽에서 가장 산업화된 국가의 지위를 누렸다. 영국이 자본주의 세계체계에서 패권국가로 등장한 것이다.(309)

영국의 패권이 확립되자 유럽은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1815년부터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까지 100년간의 평화를 누리게 된다. 100년 동안 유럽 열강 간에 벌어진 전쟁은 크림 전쟁이 유일했다. 영국은 빈 조약을 체결해 유럽에서 세력 균형을 이루어냈고, 곡물법 폐지(1846)와 항해조례 폐지(1849)로 대표되는 자유무역을 실행했다.(310) 자유무역 실시 이후 20년간 영국은 유럽 국가들의 수출 물량의 4분의 1, 전 세계 수출 물량의 3분의 1을 수입했다. 미국과 호주 등 영국의 ()공식자치령은 영국에 대한 의존도가 더 심했다.(311)

역국은 영국 중심의 자본주의 세계체계를 구축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국가들이 영국의 세계체계에 포괄되었다. 영국은 19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세계의 공장이 되었다.(311) 견고했던 영국의 패권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심각한 위기에 처한다. 1차 세계대전은 영국 중심의 100년간의 평화를 뒤흔들어놓았다. 하지만 미국이 영국을 대신해 새로운 패권국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군사력, 국제교역 질서 등)을 갖추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312) 아리기 등에 따르면, 영국에서 미국으로의 자본주의 세계체계 패권의 이동은 크게 세 단계를 거친다.(312-315) ··· 전간기에 있었던 대공황으로 인해 영국 중심의 세계질서는 붕괴되었고, 자본주의 세계체계는 몇 개의 국민국가와 부속 식민지로 구분되는 블록화된 보호주의 체제로 전환되었다. 영국조차 자유무역을 포기했다. 영국은 19319월 파운드화의 금 태환을 중지했고, 런던을 중심으로 한 전 세계적 금융망은 해체되었다. 자본주의 세계체계에서 영국의 후퇴는 보호주의를 강화했고, 자본주의 세계체계는 혼돈에 빠졌다. 전간기의 혼돈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패권하에서 새롭게 구성될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주요한 특성을 미리 보여주었다. 자유방임은 존재하지 않았고, 국가는 시장 질서에 조금씩 깊숙이 개입해 들어가기 시작했다.(315)

 

2. 영국 패권하의 자본주의와 미국 패권하의 자본주의

 

1) 영국 패권의 해체

산업혁명은 영국이 자본주의 세계체계에서 패권을 장악하게 된 결정적 조건이었지만, 그것이 곧 영국 패권이 산업자본주의에 기초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영국 패권은 전지구적 차원에서 보면 산업자본주의라기보다 상업제국주의 또는 전 지구적 상업 네트워크에 기반을 둔 영토제국주의라는 규정이 더 적절하다. 영국 패권하의 자본주의 세계체계에서는 이전과는 상이한 특성이 나타났고, 이는 이후 역사적 복지국가의 형성과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된다. 때로는 직접적으로, 때로는 간접적으로 영국적 특성을 부정하는 것을 통해 역사적 복지국가의 출현과 관련을 갖는다. 영국 자본주의는 네덜란드 자본주의와는 상이한 네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316)

영국은 영토제국주의를 통해 산업생산의 비용을 내부화함으로써 생산비용을 통제할 수 있었다.(316-317) 영국 자본주의의 지배적 기업 형태가 가족기업이었다는 점이다.(네덜란드 패권 시대의 지배적 기업 형태는 동인도 회사와 같이 국가가 독점권을 부여한 특허 주식회사)(317-319) 상품생산과 교역의 대상이 광범위한 계층으로 확산되었다.(네덜란드: 향신료로 대표되는 고가 상품 / 영국: 면직물 등 대중적 소비제품) 역사적 복지국가의 기본 토대가 되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라는 포디즘의 맹아 형태의 자본주의 생산체계가 구축되기 시작. 영국 패권하에서 대규모 노동계급이 형성되었다. 대량 소비는 대량생산을 위한 대규모 산업노동자계급을 양산할 수밖에 없었다. 산업노동자가 급격하게 증가한 것이다. 영국 패권 시기의 자본주의가 자신을 뒤흔들 대규모 노동계급을 창출한 것이다. 결국 새롭게 등장한 노동계급을 체제 내로 포섭할 수 없었던 영국 패권의 한계가 패권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행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319)

 

2) 미국 패권의 등장

미국 자본주의는 영국 자본주의와 몇 가지 상이한 특성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 자본주의의 패권이 영국 자본주의와의 단절만큼 연속성 또한 갖고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미국 자본주의의 특성은 영국과 달리 영토제국주의에 기반을 둔 자유방임적 세계질서를 추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미국이 영토제국주의(식민지)를 추구하지 않았다기보다는 미국의 영토제국주의가 미국 대륙 밖에서가 아니라 대륙 내부에서 추진되었다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320)

영국식 가족기업을 대신해 주식회사를 다시 호명했다는 점이다. 미국 패권의 부상과 함께 세계 무역을 지배한 자본주의적 기업 형태는 수직적으로 통합된 초국적 법인기업(주식회사)이었다. 미국식 법인기업은 영국식 가족기업과 달리 원료 조달부터 생산과 판매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수직적으로 통합해 거래비용을 내부화했다. 미국식 법인기업은 영국식 가족기업의 맹점이었던 원료 구매비용, 시장 확보, 재고 관리 등에 소요되는 비용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다.(320) 특히 슈워츠는 이를 경영의 전문직화, 산업의 카르텔화, 생산의 전력화, 생산과정의 테일러주의화라는 네 가지 연성혁신으로 설명한다.(321)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 미국은 영토제국주의적 패권을 추구하지 않았고 자체 시장이 충분히 컸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국가 간 무역에 덜 의존했다.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관점에서 보면 미국의 이러한 특성은 심각한 문제를 유발할 수 있었다. “영국은 패권국의 역할을 계속 맡고 싶었지만 이를 감당할 수 없었던 반면 미국은 이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지만 이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1920년대에 전지구적 경제 지도력이 실종되고말았던 것이다. 미국은 일국적 수준을 넘어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유지를 위해 대안을 마련해야 했고, 이러한 필요가 1929년 대공황 이후 역사상 유례없는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 형태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321) 미국은 영국과 달리 개별 국가(지역)를 직접 관리하기보다는 개별 국가가 자국 자본주의의 재생산을 도모할 수 있는 재원을 지원·제공하는 방식으로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패권을 유지하고자 했다.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미국만의 특성은 아니었다. 모든 국가들의 산업화는 국가의 개입 없이는 불가능했다. 더욱이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영국에서 미국으로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패권이 이행하면서 국가의 역할은 점점 더 중요해졌고 확대되었다. 주목할 사실은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패권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행하던 시기에 국가는 시장에 대해 보다 더 직접적인 방식, 계획이라는 방식으로 개입했다.(독일의 전쟁계획경제, 소련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미국의 뉴딜과 마셜플랜) 개별 국민국가가 자신의 자본주의 체제의 재생산을 도모하게 하는 전략은 필연적으로 노동에 대한 새로운 포섭체계로 일국적 차원에서 복지체제를 제도화하는 역사적 배경이 된다. 이 지점이 복지국가를 역사적 복지국가로 부르고 이러한 역사적 복지국가가 미국 패권하의 특수한 역사적 산물이라고 규정하는 이유 중 하나다.

패권을 놓고 미국과 독일이 경합하던 이 시기는 자본주의 체제의 관점에서 보면 독일식 조정시장경제와 미국식 자유시장경제의 초기 모습이 만들어졌던 때였다.(322) 독일과 미국의 자본주의의 차이는 자본주의 복지체제의 다양성을 설명하는 생산체제론의 역사적 논거가 된다.(323)

 

3. 패권 이행기와 동아시아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패권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행하기 시작한 187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는 현대 동아시아 자본주의 체제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시기다. 한국의 입장에서 이 시기를 보면, 중국 중심의 세계-경제(중국 중심적 조공무역 체계)1876년 조선이 일본에 의해 강제로 개항됨으로써 해체되기 시작했다. 1870년대에 들어서면 200년의 평화를 유지했던 중국 중심의 체계가 해체되고 동아시아 지역이 자본주의 세계체계에 더 긴밀히 결합되어갔다.(323)

(323-333)

 

4절 정치와 권력관계: 혁명에서 개혁으로, 사회민주주의 부상

 

1. 사민주의: 사회개혁이다! 혁명이 아니다!

전통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사회주의 혁명은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된 사회에서 발생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러나 20세기의 모든 성공한 사회주의 혁명들은 자본주의가 성숙되지 않은 사회에서 발생했다. 그나마 자본주의적 산업화에 근접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국가는 (유럽의 기준에서 보면 가장 후진적인) 러시아가 유일했고, 중국은 봉건적 유제가 강하게 남아 있던 전형적인 농업 국가였다. 반면 자본주의가 가장 발전한 곳에서는 사민주의가 성장했다. 더욱이 사민주의의 황금기는 복지국가의 황금기였던 동시에 (본래의 사민주의가 지양하고자 했던) 자본주의의 황금기였다.(335)

 

1) 노동계급과 사민주의(335-341)

 

2) 수정주의 논쟁과 사민주의의 성립(341-347)

 

3) 계급연대와 대중정당화

대중정당화

복지국가와 등치되는 사민주의의 현재 모습이 모두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사민주의가 노동계급만이 아닌 대중정당이 되고 이를 통해 의회주의 방식으로 국가권력에 다가가고자 했던 (19세기 말 이후 사민주의의 기본 전략이 되는) 선거주의와 대중의 현실생활을 개선하기 위한 복지국가의 이론의 기원이 되었다. 현재 사민주의라고 부르는 이 이념은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과 페이비언 사회주의, 독일에서 노동계급의 실제적 삶의 개선을 중시했던 페르디난트 라살의 민주적 노동조합 운동의 전통이 베른슈타인에 의해 종합되고 창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348)

1880년부터 1940년까지 사민주의 정당은 비약적인 성장을 했다. 사민당의 이러한 비약적인 성장에는 영국을 예외로 한다면 대략 1899년과 1920년 사이에 도입된 비례대표제도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349)

(350-352)

 

계급연대

사민당이 유럽에서 지배적인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사민당이 계급정당에서 대중(국민)정당으로 변화했기 때문이고, 사민당의 장기집권은 사민당이 대중정당으로서 유권자들의 기대에 얼마나 부응했는지에 따라 결정되었다. 사민주의가 자본주의 내에서 의회주의의 길을 걸어가던 그 시점부터 사민당은 더 이상 특정 계급의 정당이 아닌 대중정당을 지향했고, 대중정당을 지향하는 한 계급연대는 사민당의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필수적 전제였다.(353)

 

2. 동아시아에서 사회주의

동아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이 서구 제국주의의 침탈 이후 시작되었는지 내부의 자생적 발전에 기인한 것인지는 논쟁적인 주제다.(353) 동아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발달을 단지 서구의 침탈에 의한 반응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354)

동아시아에서 노동계급과 사회주의 세력의 성장은 서구 사회를 설명했던 방식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서구에서와 달리 동아시아, 특히 ()식민지 상태에 놓여 있던 중국과 조선에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은 곧 반제국주의와 민족해방투쟁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는 노동운동, 사회주의운동, 민족해방운동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아시아에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의 발전은 반제국주의와 민족해방운동의 맥락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어쩌면 ()식민지 상태에 놓여 있던 중국과 한국 같은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이 서유럽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노동계급의 생활개선이라는 현실적 요구를 전면화하지 못한 이유일 수도 있다.(354) 또한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이들 국가에서 구성된 복지체제의 특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변수 중 하나가 될 수 있다.(355)

 

1) 중국, 사회주의 혁명의 길(355-359)

 

2) 일본, 군국주의의 길(359-366)

5절 분배체계: 복지체제의 다양성의 맹아

 

1. 1870~1940년대의 역사적 의미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복지제도는 정치·경제 요인들과 서로 공진하며 변화했다. 그랬다면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패권의 이행과 함께 복지체제 또한 변화했을 것이다. 큰 틀에서 보면 이 시기는 영국 패권하의 영토제국주의와 가족기업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조응하는 복지체제가 미국 패권하의 비영토주의 국민구가와 법인기업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조응하는 복지체제로 재편된 때였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복지제도의 역할은 인간 노동력의 강제적 상품화에서 적극적 상품화로, 적극적 상품화에서 탈상품화로 전환되어갔다.(364) 통상적으로 복지제도는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해 노동 대중의 생활을 개선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자본주의가 본격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17세기부터 19세기의 중반까지 복지제도는 봉건적 질서에 익숙한 사람들을 자본주의 질서에 편입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복지제도가 반드시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제도화된 경우는 없다. 복지제도는 인간 노동력을 상품화하는 동시에 필요에 따라 제한적인 범위에서 구제활동을 했다.(366)

 

2. 빈민법, 영미 복지체제의 역사적 기원(367-373)

폴라니는 현대인이 ‘poor''pauper'를 유사한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에 빈민법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지적한다. 빈민법이 제정될 당시의 지배계급인 영국의 향신계급은 스스로 여가생활을 즐길 만큼 충분한 소득을 확보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을 사실상 모두 빈민이라고 간주했기 때문에 빈민(poor)이란 토지를 가지고 있는 계급을 제외한 모든 이들로 구성되어 있는 일반 민중과 사실상 동의어라고 보았다. 따라서 빈민법은 무산계급 전체에 대한 통제를 목적으로 하는 법체계라고 할 수 있다.(369)

영국의 빈민법은 16세기부터 시작해 19세기 중엽까지 자본주의 체제의 목적에 가장 잘 부합하는 대표적인 복지제도였다. 다만 구 빈민법은 하나의 단일한 법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구 빈민법은 1601년 이전에 이미 수차례의 반복된 입법 과정을 통해 제도화되었고, 1834년에 제정된 신빈민법도 여러 차례의 수정 과정을 거친 일련의 법체계다.(366)

구 빈민법의 역할은 토지를 잃고 방랑하는 광범위한 무토지 농민들을 상업적 영농이나 발전하고 있던 모직물산업에 종사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구빈민법이 부랑인과 걸인에 대해 가혹한 처벌을 하고 강제노역을 시키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법 제정의 의도를 반영한 것이다.(368) ··· 빈민법이 빈민의 강제적 상품화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 것은 1830년대 신 빈민법의 제정부터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구 빈민법이 만들어지고 운용되던 당시에 영국은 자본주의 세계체계에서 반주변부 국가였지만, 신빈민법 체계가 만들어졌던 1830년대는 영국이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패권국가로 절정을 누리고 있던 시기였다.(369) 이 시기에 산업자본주의가 시작되었고, 그에 따라 원활한 노동 공급이 영국 자본주의의 성장에 필수적인 조건이 되었다. 실업자와 구호가 필요한 빈민을 구분하지 않고 빈민에 대한 보호라는 가부장주의에 기초한 구빈민법은 영국이 맞이하고 있는 새로운 산업자본주의에 적합한 복지제도가 더 이상 아니었다. 구 빈민법은 자신이 일한 만큼 임금소득을 얻어야 하는 산업노동자의 출현을 가로막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370)

신빈민법은 당시 영국 자본주의의 상황과 조응하지 않는 구빈민법에 대한 점증하는 비판에 힘입어 제도화되었다. 신빈민법에서는 정직한 빈민, 일하는 빈민이라는 개념을 폐기하고 빈민계층을 실업자로 새롭게 범주화했으며 실업자를 구제할 필요가 없는 대상으로 간주했다. 새로운 빈민계층으로 정의된 실업자들은 죽지 않으려면 노역소에 입소해야 했다. 신 빈민법은 실업자들이 노역소에 입소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어떤 조건에서라도 자신의 노동력을 시장에 내다 팔도록 했다. 자본주의 체제라는 거시적 차원에서 보았을 때 복지제도는 이렇게 인간 노동력을 강제적으로 상품화하는 주요한 제도적 장치가 되었다.(371)

··· 분명한 점은 1349년 노동자조례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빈민 통제에 관한 법률체계가 현대 미국과 영국의 복지체제의 성격을 규정하는 기원 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373)

 

3. 독일, 사회보험과 국가 개입, 보수주의 복지체제의 기원(373-380)

비스마르크의 사회보험은 사회, 정치, 경제의 역사로부터 유래된 다양한 요인들이 상호작용하면서 제도화된 것이다. 사회보험이 제도화되면서 자본주의 복지체제의 복지정책의 목적은 근본적으로 변했다. 복지제도는 일반 민중의 노동력을 상품화하는 역할을 지속했지만, 빈민법처럼 노동력의 강제적 상품화를 위해 동원되지는 않았다. 사회보험은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력을 시장에서 팔아야 급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노동력의 상품화를 전제했다. 하지만 해당 노동자가 질병, 산재 등의 이유로 더 이상 자신의 노동력을 시장에 팔지 못해도 사회보험은 일정 수준의 급여를 제공했다. 이는 빈민법의 급여와는 완전히 다른 권리로서의 탈상품화가 제도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보험은 노동력의 상품화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인간 노동력을 상품화하기 위한 자본주의 복지체제의 기본 목적에 충실하지만, 일정 조건하에서 탈상품화를 용인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복지제도와는 상이했다. 더욱이 사회보험의 급여의 전제는 빈민법과 달리 적어도 명목적으로는 노동력의 강제적 상품화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374)

노동력의 상품화를 전제한 탈상품화 복지제도인 사회보험은 독일에서 표면적으로는 보수의 기획으로부터 출발했다. 하지만 일반적 이해와 달리 사회보험이 탄생된 배경에는 매우 복잡한 당시 독일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독일의 중공업, 경공업, 농업, 노동운동, 교회, 학자, 관료들 모두는 당시 독일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비스마르크가 사회보험을 제도화하려고 했던 시기에는 빈민법 시대와 달리 더 이상 소수의 지배 엘리트가 의도한 대로 복지제도를 입법화할 수 없었다. 비스마르크의 기획으로 출발한 사회보험을 둘러싼 논쟁은 복지제도를 복지정치의 한복판에 자리 잡게 했고 사민당이 노동계급의 정당에서 실질적인 대중정당으로 전환되는 역사적 과정과 함께 했다.

비스마르크가 국가가 주도하는 강제적 사회보험법의 제도화를 시도한 것은 크게 세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국가가 노동계급에 생활보장을 제공함으로써 노동계급을 국가의 충성스러운 산업전사로 양성하고 사회주의 세력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375) 국가가 주도하는 사회보험은 당시 상대적으로 후진적인 독일 산업(특히 중공업)의 국제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구상된 것이었다.(총자본의 이해 반영 - 안정적 노동 공급) 비스마르크는 영국 중심의 자유무역과 진보당에 반대하기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사회보험을 계획했다.(376) 하지만 비스마르크의 초기 의도는 이제 막 정치세력화를 시작한 사민당은 물론이고 노동운동의 광범위한 저항에 직면했다. 보수적인 가톨릭 이념으로 무장한 중앙당은 물론이고 보수적인 민족주의 정당인 민족자유당도 국가 주도의 사회보험에 반대했다.(377)

사회보험의 또 하나의 중요한 특성은 사회보험이 독일의 오래된 전통과 국가의 적극적 역할을 지지하는 독일 역사학파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점이다.(378) 비스마르크의 사회보험에는 노동자가 국가를 위해 자신의 의무를 다한다면 국가는 노동자들에게 적정한 수준의 생활을 보장해줘야 한다는 독일의 전통이 담겨 있다. 또한 비스마르크의 사회보험은 독일의 산업화를 위해 자유주의에 반대했던 당시 독일 역사학파의 이념을 실천한 정책이기도 했다. ··· 맨체스터 자유방임주의가 지배적이었던 당시 상황에서 국민 생활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 역할을 이론화한 독일 역사학파는 1941년의 독일 전시계획경제를 시작으로 이후 소련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미국의 뉴딜, 스칸디나비아의 복지체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본과 한국의 개발국가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복지체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379)

 

4. 1940년대 이전 스칸디나비아 복지체제의 유산(381-389)

스칸디나비아 사회주의 정당의 핵심 이념인 사회민주주의는 독일로부터 수입된 이념이다.(381) ··· 에르푸르트 강령 이후 독일 사민당에서는 수정주의 논쟁이 본격화되었고, 스웨덴 사민당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당의 공식문서에 명시적으로 반영하지는 않았지만 가장 철저한 수정주의 정당으로 변화했다. ··· 1917년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사민당에서 이탈하자 스웨덴 사민당의 수정주의 성격은 더욱 강해졌다. 독일 사민당이 1차 세계대전 이후 사민주의 이념의 지도력을 상실해갈 무렵에 스웨덴 사민당은 독자적인 이념과 정치적 관점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스웨덴 사민주의는 오늘날 보편주의 복지국가의 토대가 되는 몇 가지 중요한 역사적 경험들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보편주의가 단시간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이 걸렸고, 보편주의가 실현된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처음부터 보편주의 복지를 지향했던 것은 아니다.(382) 또한 보편주의 복지가 중간계급의 이해에 기초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중간계급의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 반드시 보편주의는 아니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보편주의 복지정책과 보편주의의 정치적 기반으로서의 중간계급을 상정하는 것은 일종의 신화다. 전간기 동안 스웨덴 정책은 분명 중간계급에 집중되었다. 하지만 중간계급에 집중된 복지정책은 취약계층을 제도로부터 배제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 민주주의와 보편주의의 관계도 분명하지 않았다. 복지제도 도입 초기부터 복지정치가 작동했고 이러한 복지정치가 스칸디나비에서의 복지제도 도입과 확대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 것도 역사적 사실에 반한다.(383)

전간기 동안 스웨덴 사민당은 노동계급의 정당에서 국민정당으로 탈바꿈한다. 스웨덴 사민당은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계급정당이라고 규정해야 했지만, 동시에 민주주의를 추구했기 때문에 대중정당이 되어야 했다. 스웨덴의 사민당의 국민정당화는 매우 이른 시기에 이루어졌다. 사민주의가 복지국가와 등치되는 개념으로 이해되는 것도 사민당의 국민정당화를 고려하지 않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383)

이 시기(전간기) 스웨덴 사민주의의 역사적 경험은 이후 서구 복지국가의 기본 원칙이 되는 몇 가지 중요한 역사적 유산을 남겼다. 첫째, 20세기 중반에 만개할 복지국가는 국민국가에 기반한다는 것, 둘째, 사민당은 계급정당이 아닌 계급연대에 기반을 둔 국민정당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셋째, 복지국가는 자본주의의 안정적 성공에 근거하고, 자본주의의 안정적 성공은 공정한 분배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넷째, 분배의 가장 중요한 기초는 안정된 고용이라는 것, 마지막으로,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의 관계는 이분법적 선택의 문제가 아닌 양립 가능한 과제라는 것이다.(389)

 

5. 기업복지, 일본 복지체제의 특성(389-393)

일본의 복지제도는 1874년 구휼규칙의 제정과 함께 시작된다.(389) 구휼규칙은 친족 및 공동체의 상호부조를 원칙으로 하고 친족 및 공동체가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할 경우 국가가 개입하는 것을 명문화했다. 구휼규칙의 주 대상은 극빈층 중 폐질자, 노약자, 중병자, 고아 등에 한정되었으며, 특히 성인의 경우 취업할 수 없는 자로 그 대상을 한정했다. 보충성의 원칙에 근거한 국가의 지원도 명목상이었지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구휼규칙의 구빈활동은 주로 행려병자에 맞추어져 있었고 실제 빈민층에 대해서는 거의 지원하지 않았다. 1870년대부터 1910년대까지는 일본이 메이지유신,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차례로 겪던 혼란기로, 빈곤을 빈민의 나태한 생활로 인한 인과응보로 여겼던 시기였다. 특히 이 시기에 일본 자본주의가 원시적 축적을 하고 있었고 서구 제국주의 침탈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에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일본이 자본주의 체제에 조응하는 복지정책을 제도화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메이지 시대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제국의회에 여러 차례 구휼규칙에 대한 대체입법이 제출되었지만 모두 폐기되고 법제화되지 못했다. 구휼규칙은 1929년 공적 구빈입법인 구호법으로 대체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구호법은 영국의 빈민법처럼 처음으로 공적 구호를 명문화했다. 하지만 구호 대상이 된 사람의 보호청구권이 인정되지 않는 것은 물론 선거권과 피선거권고 제한되었다. 이 시기에 일본은 전시체제를 구축했고 복지제도도 전시체제에 조응하는 방식으로 재편했다.(390)

일본은 개항과 함께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했지만, 복지제도는 자본주의 체제의 미성숙으로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까지 전통적인 구빈 정책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전후 일본 복지체제의 특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제도 중 하나가 형성되었다. 일본에서는 기업복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기업복지가 형성·확대된 것은 당시 일본 자본주의의 고유한 특성과 관련된다. (중화학공업 발전 시작 - 공장에서 일할 안정적 기술 인력 필요 - 십장 또는 오야붕이라는 노동 관행 - 산업 수요를 충족하지 못함 - 일본 정부는 대기업이 스스로 전문 인력을 양성하도록 했음) 당시 일본 산업의 필요가 기업복지를 확대했다고 할 수 있다.(391)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기업복지의 확대는 유럽과 달리 국가복지가 확대되지 못했던 일본의 상황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391) ··· 방면위원회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정부는 방면위원회를 일본 사회복지사업의 중심적 기관으로 추인했다. 그럼에도 정부는 정부 재원을 복지에 지출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복지활동에 필요한 재원은 민간 스스로 충당하기를 원했다. 국가 차원에서 적절한 복지가 제공되지 않는 상황에서 기업으로서는 생산력 유지와 지속적인 이윤 담보의 근간이 되는 노동력의 안정적 수급을 위해 기업 자체의 복지가 필요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구조적 조건과 일본의 전통적인 가부장제적 온정주의 문화가 결합되면서 기업복지가 확대된 것이다.

기업복지의 확대로 대기업 노동자들은 중간계급과 같은 생활을 누렸지만 당시 대기업 노동자는 일본 전체 노동자 중 소수에 불과했고 이때부터 이미 노동계급 내부의 분화가 나타났다. 노동계급이 단일한 정체성을 갖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노동운동의 성장은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노동자들의 생활개선 요구투쟁 또한 힘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392)

그렇다고 일본 노동계급이 그저 현실을 받아들인 것만은 아니다. (노동쟁의) ··· 일본 복지체제는 군국주의가 정점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형성되었다.(3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