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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것/복지국가, 사회정책

6장_한국 복지국가의 기원과 궤적 1 자본주의로의 이행의 시작 - 18세기부터 1945년까지

6장 전자본주의 분배체계의 해체: 18세기부터 1910년 강제병탄까지

 

1절 문제제기

적어도 한 국가가 500년 이상 존속했다는 것은 그 국가의 정치·경제·분배체계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의 분배체계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계급모순을 완화시켜 조선이라는 전자본주의 체제를 500년 이상 지속시킨 핵심제도다. 그렇다면 조선을 반 천 년간이나 유지시킨 분배체계는 무엇이었을까? 사회복지학계에서 출간된 문헌을 보면 조선시대의 복지정책으로 향약, , 두레, 진휼, 진대, 납속보관, 구료, 사궁에 대한 보호, 견면 등을 공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400)

하지만 이러한 제도들로는 조선 분배체계의 전체적 상을 그릴 수 없다. 조선의 분배체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대 복지체제를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 생산이 직면하는 위험에 대응하는 체제로 이해하는 것처럼, 조선의 분배체계 또한 당시 생산이 직면하는 위험에 대응하는 체계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의 분배체계로서 복지체제가 자본주의의 지속성을 담보하듯이, 조선이라는 전자본주의 체제의 분배체계 또한 (복지체제와 같이) 전자본주의 체제의 지속성을 담보하는 등가적 기능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복지체제는 상품화할 수 없는 인간 노동력을 상품화한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사회보험, 수당, 돌봄 서비스 등과 같이 인간 노동력을 탈상품화 및 탈가족화하는 제도를 통해 완화함으로써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지속성을 담보했다. 반면 전자본주의 분배체계는 전자본주의 체계의 기반인 자족적 농업생산을 위협하는 자연재해 등과 같은 위험에 대응함으로써 전자본주의 체제의 지속성을 담보했다.(401) 이런 인식에 근거한다면 설명해야하는 것은 단지 조선의 개별 분배제도들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전자본주의 체제의 생산양식의 지속성을 담보하는 총체로서 조선의 분배체계가 무엇인지다.

이러한 인식을 기초로 6장에서는 분배체계를 전자본주의 체제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접근했다. 특히 환곡을 조선 사회의 존립을 보장하는 가장 중요한 분배제도로 재해석했다(강조-인용자). 환곡을 조선 후기의 분배제도로 재해석하는 것은 기존의 사회복지학계의 관행에 반하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 사회복지학계는 조선의 분배체계를 향약, 두레, 계 등 민간의 자발적 상호부조로 파악하거나 빈민에 대한 진휼정책을 기술하는 것에 그쳤다. 전자본주의 체제의 핵심 분배제도인 환곡을 삼정 중 하나로 진정, 군정과 함께 농민을 수탈한 조세제도로만 이해했다. 조선시대의 분배제도를 다룬 대부분의 문헌은 환곡을 다루지 않는다. 곡식을 대부해 굶주린 사람들을 구제하고, 농업생산을 유지시키기 위해 종자 곡식을 빌려주는 환곡은 비록 그 기능이 급격히 축소되고 수탈제도로 변형되어갔지만 대한제국의 마지막까지 지속되었다. 사실이 이와 같다면 조선의 분배체계는 계, 두레, 향약 등과 같은 민간의 제도나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구휼정책만으로 이해될 수 없다.

구체적으로 조선 후기에 상품화폐 경제가 어떻게 발달했는지, 개항으로 조선이 자본주의 세계체계에 편입해 들어가면서 대표적 분배체계인 환곡이 어떻게 변형·해체되었는지를 검토했다. 이를 통해 본 장에서는 환곡을 수탈 제도로만 접근했던 기존 연구를 비판하고, 환곡을 조선이라는 전자본주의 체제의 자족적 분배체제를 구성하는 핵심제도로 재평가했다.(402)

 

2절 시기 구분: 18세기부터 1910년까지

시기

경제체제의 특성

권력관계의 특성

분배체계의 특성

환곡체제의 위기

18세기~1876

·지주전호제의 해체

·농민층의 분화와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

·자족적 생산에서 시장을 위한 생산으로의 전환기

·농업의 정체와 위기

·탕평정치에서 세도정치로 전환

·농민의 영세화와 양극분해로 인한 부농 형성 대 소농사회

·반봉건세력으로서 농민의 성장

·조세 수취 방식의 변화: 비례제에서 총액제로

·환곡제도의 위기

·환곡의 조세 성격 강화

·환곡 개혁의 실패

환곡체제의 해체기

1876~1895

·농업의 내재적 발전의 위기

·지대 수취의 변화

(타조제에서 도조제로)

·미곡 대일 수출을 위한 지주제의 강화 시작

·권력관계의 성격 전환(국내적 관계에서 국제적 관계로)

·권력관계: 민중 대 봉건세력+외세(·)

·신흥 상인계급(객주) 등장

·환곡 중심의 자족적 분배체제와 경제체제의 변화 간의 모순 심화

·환곡이 사창제로 전환

·환곡의 노동력 재생산 기능 약화

환곡체제의 소멸기

1895~1910

·대외교역(원료 수출과 상품 수입의 주변부적 경제체제로의 전환)

·곡면교환체계의 형성

·부농 경영의 몰락. 지주 경영으로 전환

·상공업 분야. 소상품생산자 몰락

·변혁세력으로 농민의 등장(갑오농민전쟁)

·권력관계: 민중 대 봉건세력+외세(일본)

·반자본주의 농민운동

·신분제 사회의 해체

·환곡이 빈민 구제를 위한 사환으로 변화

·진휼기관으로 혜민원의 운영과 폐지

 

환곡이라는 분배체계를 중심에 놓고 18세기부터 1910년까지 시기 구분을 해보면 첫 번째 시기는 18세기부터 1876년 개항까지로 조선의 자족적 분배체제인 환곡체제가 위기에 처했던 시기다. 조세수취방식이 비례제에서 총액제로 변화하고, 분배정책으로서 환곡의 기능이 약화되고, 환곡의 조세적 성격이 강화되면서 분배제도였던 환곡이 농민을 수탈하는 제도로 변화한 시기다. 조선정부에 의해 여러 차례 환곡에 대한 개혁이 이루어졌지만 환곡제도를 변화하는 경제사회 조건에 맞게 개혁하지 못했다. 경제적으로는 지주전호제가 해체되고, 농민층의 분화와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이 이루어졌다.(404) 느리고 지엽적인 변화였지만 생산은 자족적 성격에서 시장을 위한 생산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권력관계는 조선의 정치가 탕평정치에서 세도정치로 전환되고, 농민의 양극분해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농민은 평안도 농민항쟁(홍경래의 난)과 임술농민항쟁(진주민란)을 거치면서 반봉건 정치세력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시기는 1876년 개항부터 1894(5)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났던 시기까지로 환곡체제가 해체된 시기다. 이 시기는 자족적 분배체제의 핵심제도로서 환곡이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인해 분배제도로서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던 시기다. 조선정부는 제3차 갑오개혁 기간 중 사환조례를 반포해 사환을 제도화하고 환곡을 폐지했다. 수백 년 동안 조선 사회의 장기안정화에 기여했던 체제유지 수단이자 대표적 분배 정책인 환곡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405)

1895년 이후 조선 사회에는 사실상 공식적인 공적 분배체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은 공적 분배제도 없이 체제를 유지해야 했다. 경제적으로는 개항 이후 미곡의 대일 수출이 급증하면서 농업 생산의 상업화가 가속화되었고, 조선경제가 일본경제에 편입되기 시작한 시기다. 권력관계의 특성을 보면 조선의 권력관계가 일국적 관계에서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열강이 조선에서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는 탈-일국적 관계로 전환된다. 아래로부터의 변혁의 물결을 대표했던 갑오농민전쟁이 외세와 봉건 정부의 가혹한 탄압으로 진압되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의 식민지화를 본격화한 시점이다.(406)

마지막으로 1895년부터 1910년까지는 환곡체제가 완전히 소멸한 시기다. 1901년 혜민원이 설립되어 갑오개혁 이전에 환곡이 담당하던 진휼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혜민원도 1903년 폐지되면서 중앙정부가 관리하는 공식적 분배제도는 사라지게 된다. 다만 환곡과 같은 곡물 비축 제도가 공식적으로 제도화된 것은 아니었지만, 1910년 일제에 의한 강제병탄 전까지 부분적으로 존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제적으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조선경제는 일본에 식량과 원료를 제공하고, 공산품을 수입하는 주변부적 성격이 강화된다. 곡면교환체계가 형성된 것이다. 농업생산에서는 부농경영이 몰락하고 지주경영이 강화되었고, 상공업분야에서는 토착 소상품생산자가 몰락한 시기다. 권력관계는 변혁세력으로 농민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지만, 외세에 의해 제압당하면서, 민중적 발전의 길이 좌절된 시기다. 동시에 갑오개혁을 통해 조선의 탈신분사회로 발걸음을 내딛게 된 시기다.(406)

 

3절 경제: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과 세계체계로의 편입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조선 경제체제의 근간인 소농사회가 흔들리고 수공업과 농업 부문에서 상품화폐 경제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환곡으로 대표되는 자족적 분배체제와 경제체제 간의 모순을 심화시켰다. 실제로 19세기를 거치면서 소농의 생존과 노동력 재생산을 보장하던 환곡의 기능은 급격히 약화되어갔다. 반면 환곡의 부세 기능이 강화됨으로써 환곡은 수탈적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자족적 분배체제의 모순은 개항 이후 조선이 자본주의 세계체계에 주변부 국가로 편입되면서 더욱 심화된다. 자본주의 세계체계로의 강제적 편입은 조선에서 상품화폐 경제의 발전이 더 이상 일국적 이해에 기초한 과정이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이해에 따른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407) 결국 개항 이전의 상품화폐 경제의 발전과 전통적 분배체계의 붕괴는 1811년 평안도 농민항쟁(홍경래의 난)1862년 임술농민항쟁(진주민란)에서 보듯이 봉건질서의 해체를 가속화했다. 개항 이후에는 봉건질서와 자본주의 세계체계에 저항하는 아래로부터의 일련의 정치적 변혁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408)

 

1. 개항 이전의 경제체제의 특성

조선은 독립적 자영농이라고 할 수 있는 소농의 재생산 능력을 보존하기 위한 분배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18세기 당시 1천만 석에 달하는 환곡이 비축되어 있었다는 것은 조선 사회가 엄청난 규모의 국가적 분배체계를 구축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만약 개항 이전의 조선 사회가 여전히 소농 중심의 사회였다면, 조선 후기 분배체계의 과제는 소농의 재생산을 보장하는 환곡과 같은 자족적 분배체제를 효율적으로 유지하는 것이었을 터이다. 하지만 만약 상품화폐 경제의 확대로 인해 소농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경제체제가 붕괴되어가고 있었다면, 환곡으로 대표되는 조선의 분배체계가 효율적으로 작동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409)

18세기부터 개항 전까지 조선 경제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크게 두 가지 의견이 대립된다. 연구사적으로 보면, 1945년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 조선 후기 사회에 대한 인식은 정체론에 기초한 식민사학의 관점을 벗어나지 못했다. 조선 사회 정체론의 핵심은 조선 사회가 수백 년 동안 발전을 멈추고 정체해 있었기 때문에 개항과 같은 외부의 자극 없이는 발전이 불가능했다는 것이다.(409)

조선 사회를 정체된 사회로 바라보았던 식민사학에 대한 비판은 1960년대 이후 조선 사회 내부의 변화와 발전을 보여주는 실증적 연구가 축적되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한우근, 김용섭, 강만길 등의 사학자들이 196712월 한국사연구회를 결성하고 1969중고등학교 국사교육 개선을 위한 기본 방향이라는 시안을 발표하면서 조선사 연구의 관점이 정체론에서 내재적 발전론이라고 불리는 방향으로 급격히 전환되었다. 시안에는 조선경제사의 연구 방향을 결정짓는 몇 가지 중요한 원칙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중 분배체계와 관련해서는 두 번째, 세 번째, 다섯 번째 원칙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 사회가 정체된 것이 아니라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 법칙에 따라 발전했다는 것, 그 발전의 동력을 외부세계(일제의 침탈)가 아니라 조선 사회 내부에서 찾겠다는 것, 발전의 내적 동력을 위가 아닌 아래로부터 찾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에 입각해 한국사를 설명하는 이론적 틀로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 내재적 발전론이고, ‘자본주의 맹아론’(412-413에서 상세 설명)은 내재적 발전론이 조선 후기 경제 분야를 설명하는 이론적 틀이다. 자본주의 맹아론에서는 조선 후기를 생산력의 발전으로 지주전호제에 기초한 토지소유관계가 해체되고 농민층의 분화와 상품화폐 경제가 확대되었던 시기로 이해하고 있다. 이양법의 확산 등 농업생산력의 발달은 지주전호제를 해체하고 농민층의 분화로 이어졌다. 상업농의 성장이 가능해졌고, ‘경영형 부농이 출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411)

조선 후기 농업에서 경영형 부농의 존재는 조선 후기에 임금노동관계가 출현하고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조선에서의 자본주의 맹아의 발생을 입증하는 중요한 논거가 된다. 경영형 부농의 존재는 신분제에 근거한 지주전호관계가 붕괴하고 부농이 무토지 농민들, 즉 농업임금노동자를 고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농업 분야에서 임금노동자의 출현은 농업 생산이 자족적 수요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시장을 위한 상품 생산을 목적으로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임금노동자의 출현은 농민층의 분해는 물론 상품화폐 경제의 확대의 근거가 된다.(414)

농민층의 분해가 곧 상품 생산을 하는 경영형 부농의 성장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는 논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토지와 경작지가 소수에게 집적되면서 토지를 잃거나 토지가 줄어든 농민들이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414) ··· 조선 후기에 대부분의 농민은 영세농민화되는 양극분해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다.(415)

상공업 분야에서는 상인들이 봉건질서를 약화시키고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전제조건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봉건정부는 기본적으로 공업과 상업 부문에서 재부생산을 억제했다[억말론]. 조선조정의 기본 정책[재권재상론 또는 이권재상론]은 부를 중앙에 집중시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조선 초기의 봉건정부는 장시의 형성을 억제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농민층의 분해가 심화되자 봉건정부는 장시가 농민층의 불안정성을 완화할 수 있다는 논리[무본보말론]를 수용하면서 장시를 용인하게 된다. 특히 1791년 신해통공은 시전상인에게 부여되었던 금난전권을 부분적으로 폐지해 사상도고를 활성화하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변화는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전국적으로 1천 개가 넘는 장시가 열리는 등 상품화폐 경제의 확대로 이어졌다.(415) 특히 주목할 만한 현상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이행의 두 번째 길이라고 언급한 상업자본이 생산 부문에 투입되어 생산 부문을 장악하는 사례가 나타났다는 점이다(경강상인, 개성상인). 수공업 부문에서는 대동법의 시행과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로 부역노동에 근거한 관인수공업이 해체되고 민간수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광업 부문에서는 대체로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자본주의적 관계가 발생한 것으로 본다.(416)

하지만 조선 후기에 자본주의 맹아가 출현했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도 상당하다. 북한 학계의 비판, 해외 학계의 비판. ··· 농업 분야의 자본주의 맹아론에 대한 체계적 비판은 재일사학자인 안병태가 제기했다. 안병태는 한국근대경제와 일본 제국주의에서 조선 후기에 상품화폐 경제가 발전했다는 주장에는 동의했지만 자본주의 맹아로서 경영형 부농의 존재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첫째, 조선의 토지 소유는 국가, 지주, 경작자가 각각의 권리를 보유한 중층적 소유관계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토지의 사적 소유를 전제한 경영형 부농의 존립 근거가 없었다는 것이다.(417) 토지에 대한 실질적 권리는 수세조권, 관리수세권, 경작권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각각은 개별적으로 매매의 대상이 되었다. 둘쨰, 지주와 경작자가 생산물을 나누는 방식도 차지농이 경영형 부농으로 성장하는 것을 어렵게 했다. 생산물을 지주와 경작자가 1:1로 나누는 타조(분익소작제) 방식에 세금까지 부담한 차지농이 경영형 부농으로 성장하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경영형 부농이 존재했다고 해도 아주 비옥한 농지에서 예외적으로만 존재할 수 있었다고 했다. 셋째, 안병태는 김희일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18~19세기 전반에 걸쳐 조선에서 전자본주의 체제의 해체와 자본주의 요소의 발생과 같은 커다란 변동이 있었지만 변동은 조선 사회의 사회 발전의 총체적 방향을 규정할 정도의 요인으로까지 성숙할 수 없었다는 사실도 중대하게 고려되어야 한다.”고 했다. 안병태는 자본주의 맹아론이 사료를 자신들의 연구 목적에 따라 편의적으로 선택해 자신들이 보여주고 싶은 부문만을 부각시키는 부조적 방식이라고 비판했다.(418)

식민지 근대화론의 대표적 이론가인 이영훈의 주장은 대부분 안병태의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418~421) ··· 맹아론에 대한 비판은 문헌 고증을 통해 실증됨으로써 맹아론의 논거를 취약하게 했다. 특히 내재적 발전론이나 맹아론을 주장하는 논거들이 대부분 17~18세기 사례를 연구하고 19세기 상황을 추적하지 않았다는 비판에는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하지만 비판들이 모두 합당한 것은 아니다. 많은 부분이 아직도 규명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421)

개항 전까지 조선 후기의 경제 상태를 둘러싼 다양한 쟁점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신분제를 기반으로 한 조선의 경제체제와 이에 조응하는 분배체계가 이완되면서 조선 사회의 불안정성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조선은 일본에 의해 반 강제적으로 개항되었다. 개항은 가뜩이나 불안정해진 조선의 경제·정치·분배체계의 불안정성을 한층 심화시켰다.(421) 조선이 자주적으로 전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할 수 있는 주관적·객관적 조건이 더 악화된 것이다.(422)

 

2. 개항 이후 경제체제의 특성

조선의 개항은 당시 산업혁명을 완결하지 못한 전산업사회였던 일본에 의해 추동되었다. 개항 당시 조선 경제와 일본 경제의 양적 차이가 존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질적 차이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일본에 의한 조선의 개항이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이유다. 더 당황스러운 사실은 조선의 개항이 조선이 아닌 일본 자본주의의 원시적 축적과 산업혁명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422)

 

1) 농업 부문: 지주제의 강화

개항 이전과 같이 개항 이후에도 경영형 부농이 확대되었는지 여부는 축적된 연구가 거의 없어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개항 이후 경영형 부농이 확대될 수 있는 제반 조건이 악화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닌 것 같다. 18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신분제에 의한 부세체계인 조용조체계가 붕괴하고 전정, 군정, 환정()이라는 삼정이 정립된다. 삼정체계는 세금의 총액을 군현 단위로 정해 지방관과 향촌의 지배세력이 세금을 걷게 하는 방식(일명 총액제)으로 농민에 대한 지방관리의 무제한적 수탈을 가능하게 했다.(423)

더욱이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확대된 미곡의 대 일본 수출로 발생하는 미곡 상품화의 이익은 농민이 아닌 외국 상인과 봉건지배계급 등에 돌아갔다. 일반 농민의 미곡 상품화는 당시 금납화된 조세를 납부하기 위해 생존의 위협을 감내하면서까지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강제된 상품화였던 것으로 보인다.(424)

개항은 조선 사회를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주변부 국가로 편입시키면서 조선의 상품화폐 경제를 일국적 차원에서 국제적 차원으로 확대시켰다. 그러나 국제적 상품유통의 수혜자는 일반 농민이 아니라 지주였다. 1876년 개항 이후의 상품화폐 경제의 확대는 경영형 부농의 성장이 아니라 지주제의 강화로 나타났다. 부를 축적한 지주는 더 많은 토지를 집적했다.(425) 신분제의 붕괴 과정에서 나타난 개항 이후 미곡의 상품화는 ··· 소작농에 대한 지주의 수탈을 강화했다. ··· 개항부터 1894년 갑오농민전쟁 직전ᄁᆞ지 일반 농민층은 물론 상층 농민도 경영 확대를 도모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개항 이후 농업 분야에서 주목해야 할 현상은 청일전쟁 이후 일본인의 토지집적이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광무 정권은 일본인들의 토지 소유를 막기 위해 지계를 발부하는 등 정책을 추진했지만 일본이 국권을 침탈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인들의 토지 집적을 막을 수 없었다. 개항 이후의 이러한 변화는 지주-소작이라는 경제관계의 모순이 일국적 계급문제가 아닌 국제적 민족문제로 확대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조선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계급투쟁과 민족해방투쟁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했다.(426) 특히 일본의 농업정책은 조선의 국권을 강탈하는 과정에서 지주들을 일본에 우호적인 세력으로 만들기 위해 지주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427)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이 자가 소비를 제외한 잉여 농업생산물의 상품화를 통해 경영형 부농, 나아가 산업자본가로 성장하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지대의 변화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대가 타조제(비례제)에서 개항 이후 도조제(정액제)로 변화한 것도 농민적 상품화의 가능성을 높였다. 정액지대인 도조제는 경작에 관한 지주의 영향력을 감소시키고 소작인의 경영권이 강화된 것을 반영하는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개항 이후 지속적으로 발생한 항조운동과 농민항쟁은 지주 중심의 상품화에 저항해 농민적 상품화를 위한 지속적인 시도였다.(427) 하지만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정책을 본격화하면서 조선에서 농업 부문의 상품화는 지주적 상품화가 절대적 지위를 확보하고 농민 수탈이 강화되며 대토지 소유와 영세 소경영이 확대되고 경영 분해가 둔화되어 부농 경영은 몰락하거나 지주 경영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일제의 식민지화 과정은 조선에서 아래로부터의 자본집적의 가능성을 차단했다.(428)

개항 이후 농업 부문의 변화에 대해 봉건정부는 개항 이전의 대응방식을 지속했다.(428) 봉건정부는 전통적 지배세력인 지주들의 이해를 보장하는 방식을 통해 농민들의 안정적 재생산을 도모하려고 했다. 갑신정변, 갑오개혁, 광무개혁은 모두 지주제를 기반으로 한 개혁정책이었다. 특히 광무개혁은 지주의 이해를 제도적으로 보장한 대표적 개혁으로 평가된다. 특히 농민층의 재생산을 보장하는 핵심정책은 환곡의 정비를 통해 환곡의 부세화로 인해 발생했던 문제를 완화해 농민들의 저항을 잠재우는 방식이었다.(429)

 

2) 상공업 부문: 곡면교환체제

개항의 가장 중요한 영향 중 하나는 조선의 상품화폐 경제를 일국적 차원에서 국제적 차원으로 확대시켰다는 점이다. 개항 이전에도 중국(), 일본과의 공식·비공식 교역은 있었다. 하지만 1876년 개항으로 조선의 전통적인 사대교린정책에 기초한 교역질서는 국제무역관계로 바뀌었다. 1876년 개항 이후부터 1910년 강제병탄까지 조선의 대외무역 규모는 급증했다. 개항 당시 중국과 일본은 아직 산업화를 거치지 않은 농업 국가였기 때문에 이들의 상품이 조선 경제를 직접적으로 위협하지는 않았다. 개항 초기에 중국과 일본 모두 영국산 면직물을 조선에 판매해 유통 이윤을 얻는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중·일의 조선 경제 침탈은 정치군사적 힘의 우위를 이용해서 이루어졌다. 일본과 중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체결된 1876조일수호조규1882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은 그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430)

개항 직후인 1876년부터 1882년까지 조선의 대외무역은 일본이 독점했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개항 이후 조선의 국제교역 양상이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전형적인 주변부 국가의 교역 양태를 띠었다는 것이다. 주변부가 핵심부 또는 반주변부 지역에 식량과 원료를 제공하고 이들 지역으로부터 자본제 상품을 수입해 소비하는 구조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조선으로부터 값싼 식량이 유입됨으로써 일본의 자본가들은 낮은 임금으로 노동자들을 동원할 수 있었는데, 이는 일본 자본주의의 원시적 축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432)

수입품은 면직물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개항 이후 조선의 대외무역은 쌀과 콩을 수출하고 당시 산업자본주의의 최첨단 제품이라고 할 수 있는 면직물을 수입하는 소위 곡면교환체계였다.(432) 곡면교환체계의 성립은 조선 사회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의 성격을 이해하는 결정적 특성이다. 홉스봄의 지적처럼,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주변부 국가인 조선 사회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핵심부 국가들의 이해에 따라 재편되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면직물 산업의 괴멸은 조선 자본주의의 발전이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핵심부 국가에 종속되는 주변부적 특성, 즉 운료 공급지와 자본제 상품의 소비지로 고착되어간다는 것을 의미했다.(433) 실제로 당시 조선 농민들은 외국의 면제품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고 수익이 낮아진 면직물 생산을 자발적으로 포기했다. 대신 콩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상품화폐 경제의 확대에 조응해나갔다. 조선에 강제된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주변부 국가로서 반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이행하고 있던 일본의 이해에 복무하는 것이었다. 조선은 이를 되돌릴 수 있는 물리력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434)

개항 이후 조선에서 일본의 지위는 1882년을 기점으로 청과 경쟁하는 양상으로 전환된다.(434) 청은 188265일에 발생한 임오군란을 계기로 같은 해 822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고 조선을 청의 정치·경제적 식민지로 만들려고 했다.(434) 청의 이러한 시도는 사대교린에 근거한 중국과 조선의 전통적 관계를 근대적 식민지체계로 재편하려는 것이었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체결로 조선은 수도인 한성을 외국 상인에게 개방하고 조선 정부가 발행한 여행권을 소지한 외국인이 내륙에서 통상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조선 시장을 외국 자본에 전면적으로 개방하는 사태를 초래한 것이다. 이 장정으로 인해 청국 상인이 조선으로 물밀 듯 몰려왔다. 특히 청국 상인의 한성 진출은 일본 상인을 압도했다. 청국 상인의 급격한 진출은 육의전의 독점권을 붕괴시키고 내륙 상권을 장악해 들어감으로써 시전상인, 공인 등 조선의 전통적 상인 계층이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 정부는 불평등조약을 개정하고 조선 상공업을 보호하는 등 근대적인 통상·산업정책을 추진하는 대신 과거에 상인들에게 부여했던 도고(독점)라는 특권을 부활시켰다. 하지만 조선 정부가 독점권을 부여하는 정책은 외국과 맺은 자유무역조약에 위반된다는 외국 공관의 항의로 실행되지 못했다. 조선은 결국 상공업에 대해 아무런 보호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외국 자본에 조선 시장을 그대로 내주게 된 것이다. 무기력한 조선 정부의 대응과는 대조적으로 시전상인들은 1885년부터 청국 상인의 한성 철수를 요구했고 1886년부터 세 차례에 걸친 철시운동이라는 집단적 저항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객주와 여각이 중심이 되어 조합을 결성해 외국 자본의 침탈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435) ··· 그러나 제국주의 침탈을 보호할 정부가 없었던 조선 상인자본은 민족자본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몰락의 길을 걸었다.

상업과 관련해 극심한 변화가 있었지만, 개항 이후 조선의 대외무역의 특성인 일본 중심의 곡면교환체계는 변화하지 않았다. 곡면교환체계는 1910년 강제병탄까지 지속되었다. 조선이 일본의 상품시장인 동시에 식량과 원료 공급지로 전환된 시점은 일본이 산업혁명 과정을 일단락 짓고 자신의 자본제 상품인 면직물을 조선에 본격적으로 수출하기 시작한 1890년대 중·후반이라고 판단된다.

개항은 국내의 상업유통 방식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기존의 행정체계를 중심으로 구축되었던 상품유통망이 개항장을 중심으로 새로운 상업권으로 형성되었다. 개항장을 중심으로 객주라는 새로운 상인 계층이 등장했다. 기선이라는 근대적 운송수단의 등장도 국내 상품유통의 확대를 가져왔다.(436) ··· 하지만 근대적 운송수단인 기선의 대부분이 외국인(일본인) 소유였다. 국내적으로 유통되던 상품도 결국 일본 자본에 의해 장악되어갔다. 또한 지방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진 상업자본에 대한 수탈도 국외 자본에 비해 국내 자보의 축적에 불리한 조건이었다. 국내 자본은 개항 이후 봉건정부의 지원을 받기는커녕 재정난에 허덕이는 봉건정부의 수탈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자본이 외국 상인과의 연계를 갖는 것은 생존을 위한 필수적 조치였다.(437)

개항 당시 조선 수공업(산업)의 발달 수준은 매우 낮았다. 면포 생산은 선대제에 의한 농민의 부업 수준이었다. 면직물이 산업자본주의의 발달에서 갖는 역사적 지위를 고려한다면 조선의 면직물 산업은 매우 뒤쳐져 있었다. 그렇다고 개항 이후 국내 산업을 육성하고 발전시킬 강력한 정부가 존재했던 것도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개항은 조선의 수공업을 몰락시켰고, 그나마 자본주의적 관계가 발전했던 광업 분야는 자본주의 열강의 이권 쟁탈의 장이 되었다. 조선 정부가 본격적으로 식산흥업정책을 추진한 것은 대한제국이 성립된 이후였다. 식산흥업에 대한 생각은 대한제국 시기 이전부터 조선 지식인 사회에 넓게 퍼져 있었다. 보호관세의 필요성, 무역수지의 개선, 상공업 교육기관의 설립 등 당시 산업화에 필요한 다양한 의견들이 언론을 통해 대중에게 전파되고 있었다.(437)

이러한 여론의 흐름 속에서 대한제국은 수입 공산품을 국내 생산품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수입대체산업 육성이라는 식산흥업정책을 추진했다. 대한제국의 일차적 관심은 수입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직물 분야에 있었다. 서양식 직조기계를 도입하고 직조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1894년 농상회사가 설립되었다. ··· 일본 자본에 대응하기 위해 1896년 조선은행이 관료자본을 중심으로 설립되었다.(438)

하지만 개항 이후 국내의 중요한 상공업 영역은 이미 일본으로 대표되는 제국주의 열강에 침탈당한 상태였다.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을 막을 강력한 정부가 없는 상황에서 조선의 자주적인 자본주의의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스웨덴과 같은 후발산업국의 초기 산업화 과정에서 광물, 목재 등 원자재 수출을 통한 원시적 자본축적도 조선에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원자재 채취산업은 제국주의 세력들의 이권 침탈과 제국주의 세력 간의 힘의 균형을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조선 정부에 의해 제국주의 세력들에게 이미 불하된 상태였다. 자본주의 산업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면직물업도 1905년이 되면 일제에 의한 강제적 육지면재배사업으로 결정적 타격을 받고 괴멸되었다. 일본의 육지면사업은 조선에서 토포 생산과 면작 간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조선을 완전한 원료 생산지로 전환시키기 위한 정책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이 자주적으로 산업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조선 정부가 고율의 관세를 부과해 국내시장을 보호하고 적극적인 산업육성정책을 실시해야 했다.

그러나 조선의 관세 자주권은 불평등조약으로 인해 개항 직후부터 심각하게 침탈당한 상태였다. 청일전쟁 이후에는 화폐정책도 일본의 통제하에 있었다. 당시 정부 정책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었던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재야세력도 외국 상품의 수입이 소비자에게 이롭다는 점에서 이를 환영하고 있었다. 러일전쟁이 발발한 1904년부터 일본은 본격적으로 조선을 일본 경제에 편입시키기 위한 작업을 진행했다.(439) 1905년 이후 조선은 일본의 식량 및 원료 공급지, 일본 내 과잉인구의 배출구와 같은 식민지로 재편되어갔다. 특히 일본이 추진한 화폐 정리 사업은 조선 자본의 몰락을 가속화했고, 일본 제일은행이 조선의 중앙은행 역할을 대신했다.

개항이 조선 경제에 미친 부정적 영향은 개항 그 자체보다는 조선에서 이루어진 개항의 특수한 성격에 기인한다. 외부세력에 의한 강제적 개항은 조선을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전형적인 주변부로 편입시켰다. 개항은 농업부문에서는 지주제를 강화하고, 상공업 분야에서는 소상품생산자들을 괴멸시켰다. 개항은 상업자본의 축적을 저해해 조선의 자주적 산업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저지했다. 이는 단지 조선 경제의 파국만이 아닌 조선 사회를 변화시킬 근대적 주체 역량을 약화·축소해 조선의 사회경제 발전에 치명적 영향을 미쳤다.(440)

 

4절 주체 형성과 권력관계: 반봉건·반제투쟁과 새로운 권력관계의 출현

주체의 관점에서 역사적 복지국가의 기원을 설명하려고 시도할 때 필연적으로 전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 과정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권력관계의 등장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의 발전을 권력자원의 관점에서 접근하든 자본주의의 다양성이라는 관점(생산체제론)에서 접근하든, 자본주의 체제에 조응하는 분배체계의 형성은 당시 계급들 간에 형성된 새로운 권력관계와 밀접히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서구적 의미에서 노동과 자본의 관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전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의 이전은 새로운 특성을 가진 계급들을 형성하는 것은 물론 기존의 계급들의 성격도 (전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기초한 이해에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기반으로 한 이해로) 새롭게 변화시킨다. 새로운 생산관계를 기반으로 한 이해의 출현은 분배체계에서도 새로운 분배제도를 요구하게 된다. 서구에서 나타난 역사적 복지국가는 자본주의로의 이행 과정에서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기초해 새롭게 등장한 권력관계(임금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가 만들어낸 분배체계다.(441)

개항을 전후한 시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조선 사회에서 나타난 권력관계에는 전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사회에서 나타나는 일반적 특성이 확대되어가고 있었지만 조선 사회의 특수성도 나타났다. 이 기간 동안 조선에서 새로운 권력관계의 출현은 조선이라는 일국적 차원의 특성과 함께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주변부로서 조선의 특성이 반영된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이 시기에 발생한 아래로부터의 봉기와 위로부터의 개혁에 나타난 권력관계의 성격이 1876년 개항을 전후해 상이한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876년 이전에 조선에서 권력관계는 철저히 일국적 차원의 문제였지만,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에 권력관계는 청과 일본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세계체계를 고려하지 않고는 이야기될 수 없다.(442)

 

1. 아래로부터의 변화: 반봉건투쟁에서 반봉건·반제투쟁으로

1) 1811년 평안도 농민항쟁: 동원된 농민

19세기는 민란의 시대로 알려져 있다. 조선 사회는 1811년 평안도 농민항쟁으로부터 시작해 1894년 갑오농민전쟁에 이르기까지 아래로부터의 심각한 도전에 직면한다.(442)

평안도 농민항쟁의 원인과 성격에 대한 역사학계의 합의된 견해는 없다. 하지만 평안도 농민항쟁의 원인은 평안도 지역의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 당시 부세체계의 문제, 세도정치라는 특성을 통해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443)

 

2) 1862년 임술농민항쟁(일명 진주민란): 기본 동력이 된 농민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해 전라도와 충청도 등 삼남 지방으로 확대된 대규모 농민항쟁이었다. 임술농민항쟁도 기본적으로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과 농민층 분해가 심화되고 있는데도 봉건정부의 수취구조와 분배체계가 구래의 수탈구조를 벗어나지 못했던 모순적인 현실로 인해 발생했다. 농민층의 분화로 신분제를 기반으로 한 수취구조의 유지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봉건 정부는 수취 규모의 적당량을 유지하기 위해 수취 방식을 비례제에서 총액제로 전환했다. 총액제는 군현 단위로 세액을 할당해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과 농민층 분해로 나타난 세수 감소를 보존하고 세금을 안정적으로 수취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그러나 총액제는 지방관의 농민에 대한 전일적 수탈을 가능하게 했고, 농민의 재생산을 담보했던 환곡의 부세화를 촉진했다. 이러한 모순이 1862년 경상도를 중심으로 한 농민의 반봉건항쟁으로 폭발하게 된 것이다.

임술농민항쟁도 평안도 농민항쟁이 노정한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평안도 농민항쟁과 같이 하층 농민이 농민항쟁의 주도세력으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임술농민항쟁의 주도층은 주로 몰락한 양반 계층이었다. 임술농민항쟁의 주도세력의 성격은 농민항쟁이 봉건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기보다는 봉건질서 내에서의 개혁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농민항쟁의 요구가 봉건적 생산관계의 근간이 되는 토지 소유에 대한 전면적 개혁으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447) 유교적 봉건질서에 침잠해 있던 몰락양반 계층에게 유교적 신분질서를 기반으로 한 봉건적 생산관계를 부정하고 농민적 토지 소유에 입각한 요구를 기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임술농민항쟁이 주로 군현 단위의 항쟁에 그쳤다는 점도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임술농민항쟁이 군현 단위로 부과되는 총액제 방식의 부세체계의 모순으로 인해 발생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한계는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다. 다만, 발생 지역의 분포라는 측면에서 보면 임술농민항쟁은 지역적 한계를 벗어났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경상도 지역이 주도한 경상도 중심의 항쟁이었다.(448)

이러한 한계에도 임술농민항쟁은 조선 사회의 권력관계에서 농민이 단일한 계급으로 구성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평안도 농민항쟁에서 하층 농민은 농민항쟁의 주된 참여자였지만 신흥 상공인 계층, 부민, 몰락양반 등 항쟁 주도세력의 동원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1862년 임술농민항쟁에 이르면 농민들은 향회에서의 합법투쟁부터 전면 봉기에 이르기까지 봉기의 전 과정에 조직적으로 참여했다. 농민이 농민항쟁의 주체로 전면에 나섬으로써 농민항쟁을 둘러싼 권력관계가 봉건세력 대 농민이라는 구도로 형성된 것이다. 농민의 주도적 참여는 농민들의 상품생산과 생존을 위협하는 부세제도의 개선을 농민항쟁의 핵심 목표로 설정하게 했다. 이는 농민운동의 중요한 계급적 성과다. 부세제도에 대한 개혁 요구는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로 농민에게 열린 소상품생산을 통한 이윤 확대의 기회를 가로막는 장애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448)

조선 조정은 임술농민항쟁의 수습책으로 분배 기능이 축소되고 부세화된 환곡을 폐지하고 세금을 토지에 집중시키는 파환귀결을 대안으로 내놓게 된다.(448) 임술농민항쟁이 조선 전자본주의 체제의 핵심 제도인 부세제도와 분배체계의 변화를 이끌어낸 것이다. 그러나 파환귀결은 실현되지 못했다. 임술농민항쟁으로 폭발된 농민의 힘에 놀란 조선 조정은 자신들이 감당할 수도 없었던 전자본주의 체제의 핵심제도의 개혁까지 제시하면서 농민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분배체계의 관점에서 보면 임술농민항쟁은 전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경제체제의 변화에 조응하지 못하는 분배체계의 모순이 조직된 주체의 요구라는 정치행위를 통해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449)

 

3) 1882년 임오군란: 도시 하층민의 봉기

1862년 임술농민항쟁 직후에 들어선 대원군 정권의 몰락과 1873년 고종의 친정, 1876년 개항은 조선 사회에서 아래로부터의 봉기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개항 이후 아래로부터의 봉기는 전자본주의 체제 내의 모순과 함께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주변부로서의 모순이 중첩된 양상을 반영하고 있다. 개항 이후 체제모순의 중층화로 인한 첫 번째 대규모 봉기는 1882년 임오군란이었다. 이는 개항 후 불과 6년 만에 발생한 아래로부터의 봉기였다. 임오군란은 기본적으로 1876년 개항 이후 상품화폐 경제의 급격한 확대와 구래의 전자본주의적 수탈구조가 야기한 모순이 당시 정치·행정·군사의 중심이었던 서울의 도시 하층민들에게 집중되면서 발생한 반봉건항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임오군란은 개항 이전에 발생한 농민항쟁과 크게 네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 첫째, 임오군란은 전자본주의 체제의 내적 모순과 개항으로 인해 나타난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중층적 모순이 야기한 항쟁이었다. 둘째, 임오군란은 주도세력과 기본 동력이라는 측면에서 개항 전에 발생한 농민항쟁들과 달랐다. 개항 전에 발생한 농민봉기의 주도세력은 주로 몰락한 양반 계층이나 재야지식인 집단이었고, 평안도 농민항쟁처럼 예외적으로 신흥 상공인 계층이 참여했다. 하지만 기본 동력은 대부분 하층 농민이었다. 반면 임오군란의 주도세력과 기본 동력은 모두 소상인, 영세수공업자, 잡역노동자, 각종 관급공사에 고용된 임금노동자 등이었다.(450) 임오군란은 19세기 들어 상품화폐 경제의 확대와 봉건적 수탈체계에 저항한 도시 하층미느이 축적된 투쟁 역량이 개항을 계기로 확대되면서 대규모 민중봉기로 나타난 것이다.(451)

셋째, 주도세력과 기본 동력을 구성했던 세력이 상이한 계층과 계급 간의 연대에 기초했다. 주도세력과 기본 동력 모두 하급 군병들이었지만, 이들 대부분은 군무 이외에 별도의 부업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의 계층·계급이 군병과 도시 하층민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이들 사이에는 계급적 공통점이 없었다. ··· 도식적이지만, 임오군란에 참여한 계층들은 노동계급이 자신의 계급 정체성을 만들어간 초기 모습을 연상시킨다.(451)

마지막으로, 임오군란은 개항 이후 조선 사회가 전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이 가속화된 시점에 일어난 민중봉기였다.(451) 하지만 임오군란은 전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대원군의 복귀로 집약되는 임오군란의 요구는 단지 개항 이전의 구질서를 회복하는 수준에 그쳤다. 임오군란 이후 제시된 개혁안은 잡세와 도고 금지 등 대원군의 1차 집권기의 정책으로 회귀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임오군란은 조선 내부의 권력관계에 외세()가 개입하는 계기를 제공해 이후 조선의 권력관계가 봉건지배층과 외세의 연합세력 대 민중세력으로 구조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아래로부터의 봉기를 통한 근대국가 수립이 조선 내부의 봉건지배세력과 압도적 물리력을 갖고 있는 외세를 물리치지 않고는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452)

 

4) 1894년 갑오농민전쟁: 주체로서 농민의 정치세력화

1894년 갑오농민전쟁은 19세기 민중봉기의 결정체다. 갑오농민전쟁은 이전의 민중봉기와 달리 사회변혁 사상과 결합되어 나타났다. 갑오농민전쟁을 추동했던 동학은 인간 중심의 새로운 이념을 제시함으로써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봉건적 지배질서를 대신하고자 했다. 동학은 당시 기층 민중의 고통을 종교적 차원에서 해소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전자본주의 체제와 제국주의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모순에 대한 실천적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동학이라는 이념이 없었다면 농민층이 군현과 도의 경계를 넘어 단일한 농민계급으로 반봉건항쟁에 나서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동학은 당시 기층 민중을 대표하는 농민들이 주도세력과 기본 동력으로 반봉건봉기에 나설 수 있게 하는 이념적 기반을 제공했다.(452) 동학은 19세기에 나타난 기층 민중의 반봉건항쟁을 농민전쟁이라는 계급전쟁으로 결집시키는 역할을 했다. 갑오농민전쟁에 이르러 기층 농민은 동학이라는 자신의 이념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는 계급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농민이 봉기의 주도세력으로 성장한 것도 갑오농민전쟁의 중요한 성과다. 특히 갑오농민전쟁의 진행 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일본군의 경복궁 침탈 이후 시작된 제2차 농민전쟁에서 갑오농민군이 항일투쟁을 매개로 조선 지배층에게 항일연합전선을 제안했다는 것이다.(453) 이는 갑오농민군이 당시 정세에서 반제투쟁(항일투쟁)을 반봉건투쟁(계급투쟁)보다 더 긴급한 투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454)

갑오농민전쟁이 군현과 도의 경계를 넘어 중앙의 봉건권력에 대항해 봉기함으로써 농민 대 봉건지배세력이라는 권력관계를 만들어낸 것도 한국의 민중봉기 역사상 전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다. 뿐만 아니라 제1차 농민전쟁이 전주화약으로 일단락되면서 항쟁 지역에 설치되었던 집강소는 과거의 민중항쟁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성과다(봉건 정부의 폐정 시정). 집강소는 농민이 통치의 대상이 아닌 통치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일대 사건이었다. 일시적이고 지방 수준에 머물렀다고 해도 갑오농민군은 집강소라는 농민정권의 수립을 통해 농민적 권력 집행과 분배를 실현했다고 할 수 있다.(454)

마지막으로, 갑오농민전쟁의 중요성은 조선이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주변부 국가로 편입되면서 나타난 모순으로 발생한 최초의 반자본주의 농민전쟁이라는 점이다. 개항은 18세기 이래 점진적으로 확대·발전하던 상품화폐 경제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했다. 곡면교환체계의 성립은 면업으로 대표되는 국내의 자생적 산업 발전의 가능성을 괴멸시켰다. 또한 지주제를 확대·강화함으로써 농민의 양극분해를 심화시켰다. 특히 대 일본 수출작물로서 쌀과 콩의 상업적 가치가 증가하면서 조선의 농업은 급격하게 쌀과 콩으로 단작화되었다. 소상품생산자로서 농민의 생계가 위협받았던 것이다. 결국 상품작물생산을 둘러싼 모순이 1894년 전라도를 중심으로 한 제1차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455)

전자본주의 체제의 수탈이 삼남 지방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갑오농민전쟁이 소규모 면작 지역과 미작 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했다는 것은 갑오농민전쟁이 전자본주의 체제의 수탈과 함께 개항으로 인해 국제적 상품화폐 경제가 농촌에 침투하면서 발생한 농민전쟁이라는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갑오농민전쟁은 단순히 봉건지배세력과 농민이라는 단순한 권력관계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갑오농민전쟁은 개하응로 인한 국제적 상품화폐 경제의 확대로 이득을 보는 지주, 상업농, 곡물상인, 면직물 수입업자와 생계를 위협받는 농민층 간의 대립이었다. 자본주의의 모순이 갑오농민전쟁을 둘러싼 권력관계의 핵심이었다. ··· 서구의 역사적 경험(프랑스혁명)을 적용해보면, 갑오농민전쟁의 성격도 단순히 반봉건항쟁이었다기보다는 당시 조선사회에서 확대되고 있던 자본주의적 관계에 대한 농민의 반자본주의항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2차 갑오농민전쟁에서 본격화된 척왜양이라는 반제투쟁도 반자본주의 항쟁이라는 구조에서 이해하면 그 성격이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457)

하지만 갑오농민전쟁은 제2차 농민전쟁에서 보듯이 근왕적 성격을 완전히 탈각하지 못했고 전자본주의 체제를 대체할 근대적 사회상을 제시하지도 못했다. 결국 갑오농민전쟁은 임오군란 이래 조선 내부의 권력관계에 개입한 외세에 의해 패배한 전쟁으로 기록된다. 갑오농민전쟁의 패배 이후 일제는 조선의 식민지화를 가속화했지만, 갑오농민전쟁은 조선 사회에서 지배의 대상이었던 농민이 역사의 주체로 전면에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갑오농민전쟁은 전자본주의 체제의 권력관계를 농민 대 봉건세력과 제국주의세력으로 양분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458)

 

2. 위로부터의 변화: 구본신참

조선의 지배계급도 개항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중화체제에 안주해 전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했던 조선의 지배계급에게 개항은 전자본주의 체제의 수탈에 저항했던 기층 민중보다 더 강력한 외부의 적을 직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개항을 전후한 시기부터 1910년까지 조선의 봉건지배세력은 다양한 방식으로 국체를 보존하려는 시도를 했다. 때로는 급진적 개혁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과거의 것은 되살아났다. 개항부터 1910년까지 조선 지배층이 추진한 개혁의 기본적 성격은 구래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것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구본신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460)

 

1) 갑신정변: 지주가 꿈꾼 부르주아 개혁

개항 이후 조선 지배층이 시도한 최초의 변혁은 1884년에 발생한 갑신정변이었다. 갑신정변은 개항 이후 서구는 물론 청과 일본에도 뒤떨어진 조선의 실상을 실감한 급진 개화파가 외세의 위협을 극복하고 조선을 근대국가로 만들어 가기 위해 시도한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460) ··· 이 같은 한계에도 갑신정변이 전근대국가에서 근대국가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단계에서 일어났고 근대국가를 지향하는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462)

갑신정변의 개혁조치 중 사회정책과 관련된 부분도 전자본주의 체제의 기능을 보정하는 수준에 그쳤다. , 부세수취제도 개선, 수탈제도가 된 환곡의 폐지, 국가가 특정 상인들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혜상공국 폐기 등 봉건적 질서를 교정하는 수준에 그쳤다. 갑신정변은 전자본주의 체제의 토대가 되는 봉건적 생산관계를 혁파할 수 있는 토지 소유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아 이전의 봉건정부와 같이 지주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개혁정책에 머물렀다. 갑신정병의 이러한 한계는 주도세력의 계급적·신분적 한계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더욱이 갑신정변의 주도세력은 정변의 물리적 기반을 일본 군대에 의존함으로써 외국의 군사적 개입을 야기했다. 갑신정변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외국 군대가 조선 내정에 간여하는 전례를 강화했다. 실제로 갑신정변 이후 조선이 시행하려고 했던 거의 모든 개혁은 외세와 직·간접적 관련하에 이루어졌다. 또한 정변에 의한 정권 장악 시도는 개화정책에 대해 집권세력은 물론이고 민중의 반감을 확대해 개혁 정책의 실행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했다.(463)

갑신정변은 조선이 봉건국가에서 벗어나 근대국가로 도약하기 위한 구조적 개혁과 방향을 제시하지 못했다. 하지만 갑신정변은 사회변혁의 주체 형성이라는 관점에서 적어도 두 가지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먼저 갑신정변은 19세기 이래 근 100년 동안 진행된 신분제 해체의 중요한 전기를 마련함으로써 기층 민중이 사회변혁의 주체로 등장할 수 있게 했다. 조선 사회에서 신분제 해체는 1801(순조 원년) 공노비 해방으로부터 시작해 1894년 갑오개혁에서 반상의 구별 없이 인재를 등용하겠다는 군국기무처의 의결로 마무리된다. 갑오개혁의 이러한 개혁조치는 갑신정변의 개혁정책을 계승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내용은 갑신정변이 인민 평등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양반제도를 폐지하겠다고 하지는 않았지만 인민 평등을 적시함으로써 실질적인 신분제 해방을 지향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신분제에 구속되지 않는 평등한 인민의 출현이야말로 복지국가를 만들어가는 주체 형성은 물론 사회변혁의 기본 전제 중 하나다. 다른 하나는 조선의 자주독립을 선언했다는 점이다.(464)

 

2) 대한제국과 개혁: 갑오개혁과 광무개혁

갑오개혁은 18947월 군국기무처가 만들어지고 활동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18962월 아관파천까지 진행된 일련의 개혁을 지칭한다. 갑신정변이 급진개화파(이후 갑신정변파)가 단독으로 시도한 개혁이었다면, 갑오개혁은 갑신정변을 전후해 분화되기 시작한 개화파들의 합종연횡과 일본의 직·간접적 영향하에 진행되었다.(465) ··· 갑오개혁이 일본의 요구에 의해 강제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갑오개혁을 일본의 요구가 반영된 타율적 개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갑오개혁이 전적으로 일본에 의해 강요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노비 해방, 문벌 타파, 재정개혁, 환곡 개혁 등은 19세기 이래 위·아래에서 제기된 개혁 요구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18947월부터 18962월까지 여섯 번이나 내각이 교체되었음에도 갑오개혁은 큰 틀에서 일관된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당시 집권세력이 조선 사회가 직면한 위기와 대안에 대해 공통의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해준다. 그러나 화폐개혁의 예에서 보듯이 일본은 조선을 침탈하기 위해 일련의 개혁조치를 강요했고, 갑오개혁은 이러한 일본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갑오개혁 기간 동안 조선의 집권세력은 갑오농민전쟁, 청일전쟁, 명성황후 시해 등과 같은 일련의 사태들이 직면하면서 친청, 친일, 친러로 대립하면서 부침을 거듭했다. 이러한 조건에서 집권세력이 단일한 대오를 형성해 자주적 개혁을 추진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집권세력은 갑오개혁 당시 조선이 자주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유일한 원동력이 될 수 있었던 기층 민중과도 적대적 관계에 있었다. 갑오개혁이 토지개혁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는 것도 갑오개혁의 계급적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갑오개혁의 가장 대표적인 성과로 평가되는 신분제 철폐도 불철저했다. 갑오개혁이 신분에 구애하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신분제의 철폐라고 보는 것은 후대의 시각에서 본 과도한 해석일 수도 있다.(466) “벽파문벌반상등급은 신분에 구애 없이 능력에 입각해 인재를 등용하겠다는 것이지 유교적 신분질서를 혁파하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의 집권세력은 개항 이래 구본신참에 입각한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여기서 구본은 유교국가로서의 기본적 가치를 잃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인 것이다. 더욱이 갑오개혁의 조치가 신분제를 혁파하고 만인 평등에 입각한 개혁이었다면 갑오개혁의 궁극적 지향점은 국민주권을 기반으로 한 근대국가의 건설이었어야 했다. 하지만 갑오개혁 이후 성립된 대한제국은 황제의 전제권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구법이 폐지되었지만 개혁이 성과 없이 끝나는 등 혼란이 지속되었다.

일본의 침탈이 아관파천으로 잠시 주춤하던 사이에 조선 지배층에 의한 세 번째 개혁인 광무개혁이 시도되었다. 광무개혁은 기본적으로 갑오개혁을 계승했지만 구본신참의 원칙하에 진행되었다. 가장 두드러진 개혁은 재정 확충을 위해 양전을 시행했다는 점이다. 이는 광무개혁의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조선 경제가 여전히 농업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양전은 9세기 민중봉기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던 토지에 부과되는 세금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광무 정권이 식산흥업정책을 추진할 재원을 확보하는 중요한 개혁정책이었다.(467) 하지만 양전은 과거와 같이 토지를 결부법(토지 면적이 아닌 수확량)에 기초해 조사했고 전통적인 지주-전호제를 전제한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지주들의 이해를 대변했다. 광무양전은 당시 상품화폐 경제의 확대로 변화하는 조선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반영하지 못했다. 광무 정권의 기대와 달리 양전은 재정 확충에 기여하지 못했다. 다만 토지 소유권을 정부가 공인해주는 지계발급사업은 최초의 근대적 토지 소유권을 보장하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광무 정권은 이외에도 금본위제도를 기반으로 한 화폐개혁을 시도하고 식산흥업을 위해 관영공장을 설립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468) 광무개혁의 두드러진 성격은 오히려 갑오개혁의 성과를 뒤로 돌려 황제권을 강화하고 정부가 특권 상인에게 독점권을 부여하는 도고권을 부활시켰으며 황실 재정을 강화하는 등 반개혁적 정책을 시행했다는 것이다. 결국 광무개혁은 1905년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면서 중단되었고, 이후의 개혁은 일본의 식민지화를 예비하기 위한 조치들로 채워진다.(469)

5절 분배체계: 해체되는 전자본주의의 분배체계

18세기부터 1910년까지의 분배체계를 조선 후기 정치경제의 변화와의 관련성하에서 검토했다. 환곡을 전자본주의 체제의 자족적 분배체제의 중심에 놓고 그 특성을 검토했다.(470)

 

1. 전자본주의 체제의 정치경제와 분배체계

전자본주의 체제의 존속은 농업생산의 지속을 통해 담보를 받는다. 조선은 신분제 원리에 따라 토지에서 나오는 농업생산물로 징수하는 세금으로 유지되었다. 세금을 부과하고 걷는 부세제도는 토지와 신분에 기반을 두었다. 조선이라는 전자본주의 체제의 유지는 농업생산의 지속성을 어떻게 담보할 것인가에 달려 있었고, 이를 위해서 조선 정부는 농업생산을 위협하는 위험에 대한 대응을 제도화했다.(470) 전자본주의 사회에서 농업생산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은 자연재해였다. 당시 자연재해는 변수가 아니라 농업생산을 일상적으로 위협하는 상수였다. 재해에 대한 대응은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조선 정부의 일상적 업무였다.

특히 16세기 이후 자연재해가 빈발했다. 정확한 시기와 관련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학자들은 대략 16세기부터 19세기 말까지 한반도의 기후가 소빙기였다는 가설을 내놓고 있다.(471) 이러한 가설을 받아들인다면, 조선 후기는 소빙기로 인해 자연재해가 빈발해 농업 생산을 심각하게 위협해 전자본주의 체제의 존속이 위태로웠던 시기였다. 특히 1670~1671(현종 11년과 12)에 발생한 경신대기근은 조선의 존립을 위협할 정도로 심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환곡이 진휼을 위한 중요한 제도로 자리 잡게 된 것도 경신대기근 이후다. 반복되는 재해에 대응하는 것이 조선 정부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였고 18세기 초에 이르면 환곡의 진휼 기능에 대한 제도적 정비가 이루어진다.(472) ··· 19세기에 들어서도 상황은 유사했다. 중앙정부의 진휼 시행이 재해 규모가 평년의 두 배 이상 되었을 때 시행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자연재해로 인해 농업생산이 위협받는 일이 일상적으로 발생했고 이에 대한 봉건정부의 대응도 일상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473)

환곡으로 대표되는 조선 후기의 자족적 분배체제는 자연재해에 대응해 농업생산과 생산력의 핵심인 농민의 생존을 보존하는 분배체계라고 할 수 있다. 현대 복지국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경기변동에 대응해 산업생산력을 유지시켜 자본주의 체제의 생산력을 보존하는 것이었다면, 전자본주의 체제에서 자족적 분배체제의 가장 중요한 역할 또한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자연재해에 대응해 농업생산력을 유지시켜 전자본주의 체제의 생산력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전자본주의 체제의 자족적 분배체제는 자연재해로 인해 발생한 식량 부족과 농사를 짓는 데 필요한 종자 부족에 대응해 농업생산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환곡은 단순히 굶주린 백성을 구제해주는 구빈정책만이 아닌 곡물 대여와 급여, 견감이라는 세금 감면을 통해 농업생산성과 농업생산의 주체인 농민의 재생산을 담보했다.(474)

환곡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운영되었다. 하나는 재해에 대비해 곡물을 비축하는 비황책이고, 다른 하나는 진휼정책이다. 진휼정책에는 세금 감면(견감), 곡물의 유상 지급 및 무상 지급, 시식, 구료 등이 있다.(475) 권분, 납속보관 등도 진휼정책으로 분류하기는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권분과 납속보관은 진휼을 위한 공공곡물이 부족할 경우 민간으로부터 곡물을 염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로 시식, 곡물의 유·무상 분배 등과는 성격이 다르다. 권분과 납속보관은 부호에게 명목상의 관직을 수여하고 곡물을 받아 진휼정책에 사용할 수 있어 국가재정을 소비하지 않고 진휼을 시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봉건정부가 선호한 재원 마련 방안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강제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다는 점에서 부민을 수탈하는 수단이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권분과 납속보관은 상업적 영농으로 부를 축적한 부농들의 자본축적을 제약했을 가능성이 높다. 마르크스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참된 혁명적 길이라고 이야기한 첫 번째 길이 생산자인 부농이 농업자본을 축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부민을 수탈해 진휼용 곡물을 마련하는 것은 조선 후기 상품화폐 경제의 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476)

진휼은 재해로 인해 흉작이 발생했을 경우 민에게 곡물을 유·무상으로 분배해 농업생산성을 유지시키는 정책이다. 조선시대에 대부분의 농민은 외부로부터 지원, 즉 환곡의 지원 없이는 생존과 생산력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당시 환곡은 특정한 소수의 취약계층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 소수의 부호와 사대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을 위한 필수적인 분배제도였다. 환곡은 조선 사회의 생산력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 제도였다.

다만 곡물이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에 봉건정부는 엄격한 기준에 따라 분배를 실시했다. ··· ·무상 곡물을 받을 대상을 선발하고 이를 집행하는 일은 전적으로 지방관의 책임하에 이루어졌다. 진정에 관한 일반적 원칙이 있었지만 지방관의 재량이 상대적으로 컸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18세기 이후 수령권의 강화와 함께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졌다. 중앙정부는 기근에 대비해 지방관아에서 수령들이 자체적으로 자비곡을 마련하도록 했다.(477)

하지만 환곡에 관한 중요한 정책 결정 권한은 어디까지나 중앙정부에 있었다.(478)

정향지가 정리한 바에 따르면, 환곡의 분급 대상은 해당 지역에 거주하고 호적에 등재된 실재 호구이면서 생산수단인 농지를 갖고 있는 자였다. 대부분의 환곡은 무상이 아니라 추수 이후에 다시 돌려받는 대부의 성격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상환 능력이 있는 민에게 지급하고자 했다. 자산이 일정 정도 있어야 환곡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로 인해 농민층의 분화가 심화되면서 농지를 갖고 있는 민의 수가 줄어들자 농지를 소유하지 않은 소작인, 공상인, 고용된 사람 등에게까지 환곡 급여를 확대했다. 또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경우에는 보증인이 있으면 환곡을 나누어주었다. 흉년 시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민이 되기를 원했으나, 진민의 조건은 까다로웠다. 대부분은 환민이 되어 분급을 받았다.(478)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환곡이 부세화되면서 민에게 강제 배분되었다. 하지만 법률적으로 명확하게 부세로 제도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분과 지위를 이용해 부를 축적한 부민들과 지역의 유력민은 환민에서 빠져나가고 빈민만이 환곡의 대상이 되어감에 따라 환곡의 부실은 더욱 커져갔다.(479)

진휼정책의 재원은 기본적으로 환곡을 통해 충당되었다. 일부에서는 환곡을 단지 부세정책의 일환으로 민을 수탈하는 도구로 이해하고 있지만, 환곡은 갑오개혁까지 재난에 대비하는 비황책(빈곤에 대비하는 정책)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482) ··· 환곡의 운영은 당시 봉건정부의 국가 운영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였다.(483)

··· 환곡의 부세화가 가속화된 18세기 후반 이후에도 환곡의 진휼 기능은 여전히 존재했다.(487) ··· 환곡의 부세화가 진행된 것은 사실이지만 진휼을 위한 환곡은 조선이 일제에 의해 강제병탄되기 전까지 존재했다.(488)

 

2.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과 자족적 분배체제로서 환곡체제의 위기

18세기 중엽 이후 환곡의 재정 보충용 기능이 강화되자 환곡은 곡물의 작황과 필요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민호에게 분급되는 부세적인 성격이 강화되었다. 전자본주의 체제의 안정성을 보장했던 자족적 분배체제로서 환곡의 기능이 약화되고 대민 수탈적 성격이 강화됨으로써 환곡이 전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를 확대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19세기 봉건정부의 수탈은 이미 신분적 질서에 의한 수탈이 아니라 상품화폐 경제의 발전을 이용한 수탈이었고, 상업적 농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부농의 성장을 가로막는 수탈이었다.(489)

1811년 평안도 농민항쟁 이후 발생한 대부분의 민란과 1894년 갑오농민전쟁 또한 환곡의 부세화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489) 다만 삼정의 문란으로 대표되는 부세 문제가 19세기만의 특별한 현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환곡을 농민항쟁의 직접적 원인으로 단언하는 것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 핵심은 신분제의 동요와 상품화폐 경제의 확대와 같은 전자본주의 체제의 전통적 질서가 와해되는 과정에서 환곡의 부세화가 농민봉기를 촉진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근본적 문제는 전자본주의 질서의 해체이지 환곡 자체가 아니었다. 더욱이 도결을 통해 세금의 수취를 관이 주도함으로써 이전까지 개별 지주들과 갈등 관계에 있었던 농민들이 해당 지역의 관과 대립하게 되었고, 이것이 19세기 중·후반 농민들이 관에 대항해 항쟁을 일으키게 된 원인 중 하나라고 추정된다.(490)

환곡의 부세화는 농민층의 분화 및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이러한 변화 과정에서 환곡은 전자본주의 체제의 유지를 위한 분배체계로서 작동하지 못했다. 농민층의 분화와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은 전자본주의적 신분질서에 의한 자족적 농업사회가 해체되어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자본주의적 농업생산체제에 조응하는 구조로 만들어진 자족적 분배체제를 대표했던 환곡이 변화하는 사회경제에 조응할 수 없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490)

환곡은 재정 보충용과 진휼이라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두 가지 성격을 갖고 있었다. 다만 현종(1659~1674) 때까지만 해도 환곡을 재정 보충용으로 활용할 의도는 강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8세기 중엽 이후 환곡의 부세화가 강화되기 시작했고 19세기에 들어서면 환곡이 본격적인 세금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역설적이지만 18세기 영·정조 시대에 들어서면서 조선 정부의 재정이 악화된 것과 관련된다. 대동법의 시행으로 공물 대신 토지에 세금을 부과하게 되면서 조세가 토지에 집중되었지만, 실제로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토지의 수는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었다. 토지에 대한 세금이 증가하자 지주들의 탈세 또한 증가했고 이는 호조의 세수 감소로 이어졌다.(491)

전통적 방식으로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서는 양전이 불가피했음에도 지주들과 이서들의 반대로 봉건정부는 1720(숙종 46) 이후 1899년 광무양전이 시행되기까지 근 180년간 단 한 차례의 양전사업도 시행할 수 없었다. 상품화폐 경제의 확대로 인해 정부의 지출은 증가하는데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토지는 감소해 봉건정부는 심각한 재정난에 직면했다. 조선 정부는 지방정부의 재정을 위해 책정되었던 대동세의 지방유치분을 중앙정부로 이송시키는 등의 방식으로 재정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균역법의 시행으로 은여결과 헤세가 균역청으로 이관된 것도 지방재정을 약화시킨 원인이 되었다. 이에 지방정부는 환곡을 나누어주어 이자를 수취하는 방식으로 부족해진 재원을 해결했다. 중앙정부도 각 관청마다 재정 보충용 환곡을 설치해 운영했다. 재정 보충용으로 운용되는 환곡은 모든 곡식을 분배하는 진분으로 이루어져서 진휼을 목적으로 하는 환곡의 절반유고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 특히 균역법 시행 이후 지방 관아에서는 이자 수입인 모곡을 늘리기 위해 비상시를 대비해 창고에 보관해두어야 할 유고곡을 나누어주는 경우가 빈발했다.(492)

이러한 일련의 괒어들이 환곡의 부세화를 가중시켰다. 더욱이 이자 수입을 위해 환곡의 분급이 증가하면서 흉년 시 진휼이 필요하게 되면 창고의 유고곡을 중앙정부의 허가하에 또는 지방수령이 임의로 나누어주는 일이 벌어졌다. 흉년 시 진휼의 명목으로 시행한 가분은 원곡을 되돌려 받지 못하는 포흠이 발생해 진휼을 위해 쓰여야 할 환곡의 원곡이 감소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결국 진휼의 기능이 약화되고 세금의 기능이 강화된 기형적 형태의 환곡 운영이 농민들의 저항을 유발하게 된 것이다. 이 밖에도 중앙정부는 비총제와 같이 지방별로 면세토지의 양을 정해주는 방식으로 일정 수준의 세수를 확보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러한 총액제 방식의 부세제도(군정에서는 군총제, 전정에서는 비총제, 환곡에서는 환총제)는 중앙정부가 정액의 세금을 수취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지만 수세의 권한을 수령과 향촌의 지배층에 일임함으로써 민에 대한 무제한적 수탈을 가능하게 했다. 결국 상품화폐 경제의 확대가 농민층의 분해를 야기하고 분해된 농민층에게 재정적자를 완화하기 위한 조세가 집중되어 농민층의 분화가 한층 강화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18세기 말 환곡이 전정(토지에 부과하는 세금), 군정(군역에 부과하는 세금)과 함께 부세제도가 된 것이다.

문제는 민의 부담을 균등하게 하려는 대동법, 영정법, 균역법 등과 같은 조세 정책의 변화로 세수가 감소해 봉건정부의 재정 위기가 심화되었지만 농업 중심사회에서 이를 대체할 새로운 세원이 없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로 재정 수요가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부세는 여전히 토지에 집중되어 있었던 반면 봉건정부가 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재정 위기는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봉건정부가 상품화폐 경제의 확대에 전혀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다.(493) ···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미봉책으로 환곡의 본래 기능을 유지하면서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8세기 중반 이후 환곡이 소농의 농업생산성을 보존시키는 본래의 기능이 아닌 중앙과 지방의 재정 보충용 조세로 부세화되면서 환곡 운영의 최선의 방법은 환곡의 부담을 균등하게 지우는 것으로 변했다. 하지만 환곡에 대한 부담은 점점 더 빈농들에게 편중되어갔다. 부분적이지만 분배체계의 성격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 하지만 체제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494)

상품화폐 경제가 발전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농업은 여전히 전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중요한 생산기반이었기 때문에 19세기 중반까지도 지배층은 환곡을 원칙에 따라 운영하려고 했다. (*그러나 실패 - 1862년 임술농민항쟁 발생) 봉건정부는 1862년 임술농민항쟁 이후 파환귀결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환곡을 통한 세금 징수를 철폐하고 세금을 토지에 부과하겠다는 것이었다. 환곡에서 걷던 세금을 토지와 어물, 소금, 선박 등에 부과하는 대안도 제시되었다. 환곡의 남은 곡식은 향류곡으로 유치하기로 했고, 이에 따라 삼정이정절목이 만들어졌다. 봉건정부가 삼정이정절목을 발표한 것은 농민봉기의 원인이 환곡을 포함한 삼정의 문란에 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파환귀결로 환곡의 종자 대여와 진휼 기능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농업이 근간인 사회에서 농업생산성 유지를 위한 종자 대여와 진휼 기능을 유지시키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환곡을 대신해 1862150만 석의 향류곡이 읍 단위가 아닌 교통이 편리한 곳에 설치되었다.(495) 하지만 향류곡은 진휼적 성격보다는 예비곡의 성격이 강한 곡식이었기 때문에 구휼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환곡의 곡물 대여 기능이 사라지자 소농들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파환귀결로는 환곡의 적폐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임술농민항쟁까지만 해도 농민들의 요구는 환곡의 본래 기능은 유지시키되 환곡이 부세화되어 농민을 수탈하는 문제를 개선하라는 것이었다. 환곡을 폐지하라는 것은 아니었다. 파환귀결은 실행되지 못했고 삼정이정절목은 폐지되었으며 함경도 함흥 등지에서 농민항쟁이 다시 일어났다. 봉건정부가 환곡을 대신할 토지 이외의 세원을 찾지 못하는 한 파환귀결은 대안이 될 수 없었다. 봉건정부 내에서도 환곡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과 유지해야 한다는 상반된 주장이 상존하게 되었다. 놀라운 사실은 임술농민항쟁 이후 환곡의 폐지가 적극적으로 검토되었음에도 환곡을 통한 재정 수입은 19세기 중·후반까지 오히려 증가했다는 것이다.

파환귀결 대신 취해진 조치는 환곡의 미수곡을 탕감해주고 환곡을 균등하게 하는 탕포균환의 조치였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환곡을 대신할 재원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봉건정부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대원군, 고종 시기에도 환곡을 다시 설치 - 지속 불가능)(496)

고종은 1874년 대원군 시기의 대표적 민폐로 거론되었던 청전을 혁파하는 개혁조치를 단행했다. 하지만 당시 청전은 봉건정부가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청전 혁파가 오히려 봉건정부의 재정 문제를 심화시켰다. 봉건정부는 재정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별비곡을 재정 보충 용도로 사용함으로써 별비곡 형태로 유지되던 환곡체제의 기반이 흔들렸다.(497)

갑오농민전쟁과 청일전쟁 와중에 김홍집 내각은 1895(고종 32)에 민란과 농민전쟁의 원인 중 하나였던 환곡을 다시 혁파하고 사환조례를 반포했다.(497) 관이 운영하던 환곡을 각 면에 분배해 이를 기금으로 사용하도록 해서 민간이 사환을 운영하면서 환곡의 폐해를 줄이고 환곡의 분배 기능을 지속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사환의 기본 성격은 빈민을 구제하는 진대를 목적으로 했다는 점에서 사창제와는 달랐다. 또한 사환의 운영이 각 지연의 민들에 의해 운용되었다는 점 또한 특징적이다. 곡식 대부에 대한 이자율도 30분의 1에 불과해 재정 보충용이 아닌 진대의 기능을 명확히 했다. 고종은 재정 보충용의 기능은 토지세로 전환하고 진대의 기능은 사환제로 전환함으로써 전근대적 조세체계를 근대적 조세체계로 전환하려고 했다.

사환곡은 1901년 대기근 이후 혜민원으로 이관되었고 혜민원에서 사환곡의 관리를 포함해 진대에 대한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1904년 혜민원이 폐지되고 19075월에는 지방금융조합지방금융조합 설립에 관한 건이 공포되면서 미곡이 해당 면과 리의 재산이 되어 사환 또한 사라지게 된다. 봄에 곡식을 대여해주고 가을에 이자를 붙여 되돌려 받는 방식으로 전자본주의 체제의 농업생산력을 유지시켰던 환곡이 개항과 상품화폐 경제의 확대에 따라 그 역할을 근대적 금융조직에 넘겨주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지방 관청에서 사환곡을 재정 보충용으로 운영하는 폐해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중앙정부 또한 재정 부족을 이유로 사환곡을 재정 보충용으로 사용했다.

반복되는 재해로 인해 토지가 없는 농민들이 증가하면서 진휼정책에 대한 요구는 높아졌지만 대안은 마련되지 않았다. 조선이 패망하기 직전까지 환곡 문제는 사실상 해결되지 않았다. 다만 개항 이후 농민항쟁의 원인이 단순히 환곡 문제에 있지는 않았다.(498) 1876년 개항 이후 농민들은 단순히 과거의 전자본주의적 농업생산체제로 복귀하는 것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농민들은 상품화폐 경제의 확대 과정에서 소상품생산자의 지위를 보장받기를 원했다. 이것이 1905년부터 1910년까지 농민군이 주축이 된 의병항쟁이 소상품생산자로서 농민의 지위가 심각하게 위협받은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이유였다. 1910년 강제병탄으로 조선의 자족적 분배체제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던 환곡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499)

환곡제도의 붕괴의 원인 ··· 근본적인 문제는 신분질서에 기초한 소농 중심의 자족적 농업생산체제가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과 농민층의 분화로 해체되고 있는데도 봉건정부는 환곡이라는 소농에 기초한 자족적 농업생산체제를 유지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정치경제적 토대가 변화하고 있는데도 분배체계는 옛 방식을 유지하려했던 구조적 모순이 근본적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봉건정부가 세금을 토지에 집중하는 정책을 시행한 것은 조선이라는 봉건 사회의 토대가 되는 신분제를 봉건정부 스스로 해체하려는 것이었다. 조선 정부는 일제에 강제병탄되기 직전까지 환곡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다양한 개혁을 시도했지만 변화하는 사회경제적 조건에 조응하는 구조적 대안을 마련하지 못했다.(4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