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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것/일기, 단상, 메모

2021-03-08

일을 그만 둔지 거의 1년이 되어간다. 놀랍게도 꾸역 버텼다. 할머니에겐 꽤 오래 거짓말을 했다. 계속 일을 하고 있노라고. 그만두었다고 말하면, 걱정할 걸 뻔히 알았기에. 하지만 1년 가까이 지나면서, 더 이상 거짓말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2월을 마지막으로 그만두었다고, 마지막 거짓말을 했다. 그 이후로 할머니는 전화 때마다 걱정을 한다. ‘모아둔 돈 까먹는 건 금방인데일을 그만두어서 어떻게 하냐며, ‘도와줄 사람도 없는데한숨을 내쉰다. 할머니는 당연스럽게도 여전히 박사과정이라는 것을 잘 이해하기 어렵고, 그저 손자가 너무 오래 학생인 것을 걱정한다. 의문은 품지 않으면서도. ‘네가 하고 싶은 걸 해야지했다가도, ‘취업을 해야지 어떡하니한다. 취업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박사과정에 진학한다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저 안정적인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자리에 있길 바라면서. 나는 매번 다시 설명한다. ‘박사과정을 가야 하기 때문에 취업을 할 수 없어’. 할머니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어떤 나쁜 말도 하지 않는다. ‘계속 거짓말을 할 걸 그랬나싶기도 하다. 이제 매번 전화에는 진심어린 걱정과 괜찮다는 말이 오갈 것이다.

괜찮지는 않다. 어느 누가 괜찮겠나. 아쉽게도 로또가 된 것도 비트코인을 산 것도 테슬라나 삼성전자의 주식을 산 것도 아닌, 그저 멍청하게 벌어서 멍청하게 모아놓고 그걸 가만 까먹고 있을 뿐이다. 머릿속엔 항상 계산기가 굴러다닌다. 잔고 나누기 한 달 생계비 = 몇 개월. 어차피 병역을 해결하지 못한 상황에서 정규직이나 계약직 취업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아르바이트 자리가 마땅한 것도 아니다. 박사과정에 진학한다면, 풀타임 아르바이트는 당연히 불가능하다. 그나마 인맥이 넓으면 녹취록 아르바이트 같은 것이라도 여럿 들어오겠지만, 그렇지 못한 신세다. 코로나 때문에 인터뷰 자체가 크게 줄어든 것도 있고. 그나마 학원 강사가 병행할 만 하겠으나, 이건 대체 어디서부터 접촉해서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나마 팔아먹을 재주가 있다면, 글쓰기, 글 고치기 같은 것뿐인데 말이다. (이것도 한참을 미치지 못하니, 대중에게 팔지는 못하고 학생들에게나 겨우 흥정하는 신세인 것이다.)

박사과정에 진학할 때면, 나의 대학원은 더 이상 BK21의 수혜기관이 아니고, 그건 내가 석사과정일 때 박사과정생들이 수령했던 것과 같은 장학금이 내겐 주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50만원만 정기적으로 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자주 생각한다. 녹취록 4-5. 주말 학원 강사. 그 정도면 될 텐데. 로또니 비트코인이니, 주식은 달나라 이야기니까. 엥겔스를 기다리기에 당연히 나는 마르크스가 아니고 말이다. 나는 또 멍청하게 버는 수밖에 없다.

아직 숨이 턱 막히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걱정하는 날이 잦아졌다. 아마 반복되는 전화는 그것을 더욱 상기하게 만들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걱정하는 대신 위로해야 할 것이고, 거짓을 말해야 할 것이다.

언제쯤 좋은 시절같은 것이 올까. 그런 게 있기는 할까. 가난하면, 공부하는 게 죄가 되는 걸까. 누구도 죄를 묻진 않았지만, 스스로 칼을 찬 심정이다. 오늘 앉아서 하고 있는 공부가 정말 무엇인가가 될 수 있을까. 간절히 바라지만, 알 수 없어 두려운 것. 언제쯤 끝없이 진동하는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