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쓴 것/일기, 단상, 메모

빈곤에 관한 공부

박사과정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지금 쓰고 있는 논문과 함께 가장 큰 고민의 대상이다. 박사학위를 목표로 박사과정을 이수한다는 것은 곧 사회학적 연구를 업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나의 분야(소위 필드라고들 하는)는 무엇이어야 할까. 무엇이 나의 사회학적, 인간적 관심을 충족하며, 학계에 참여할 수 있는 출입증을 내줄 것이며, 먹고 살 수 있는 기술이 될 것인가. 세 가지 질문 모두 적당히 물러설 수 없는 문제다.

처음 학부 사회학과에 진학했던 이유, 석사과정에 진학했던 이유는 비슷했다. 불평등과 빈곤의 문제를 사회학적으로 공부하고 연구하고 싶었다. 어쩌다보니 석사과정은 다르게 흘러갔지만 말이다. 사회학이라는 대상을 알고 지낸 게 8년째다. 8년간 가장 기묘하게 여겼던 것 가운데 하나는 사회학계에 빈곤의 자리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겪은 한에서 빈곤은 다음과 같이 다뤄졌다. 서구와 북미의 복지국가(와 그것의 쇠퇴)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영국, 프랑스, 미국 같은 국가들의 빈곤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 영국의 구빈법이나 스핀햄랜드법이라든지, 미국의 신자유주의화와 빈곤 프로그램, 인종·젠더에 따른 차별 같은 것. 이것들은 모두 중요한 이야기겠지만, 한국의 빈곤과 거의 연결되지 않는다.

빈곤은 주로 사회복지학계에서 다뤄지고 있다. 빈곤율 등 통계적 데이터를 중심으로 하는 양적 연구, 빈곤한 사람들에 관한 질적 연구, 복지국가나 사회정책에 관한 연구 등. 빈곤에 관한 사회복지학적 연구의 인상은, 복지국가나 사회정책에 관한 논의를 제외한 상당부분의 연구들이 거의 이론과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이론 없이 경험 데이터만 축적되는 것의 문제는 분명히 존재한다. 이는 사회복지학계 내부에서도 인지하고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글로벌 자본주의에서 부국과 빈국의 불평등에 관한 정치학적, 사회학적 논의들도 있다. 여기서도 한국은 빈곤했으나 벗어난 나라로 부국에도 빈국에도 속하지 않은 채 제외되고 지워져버린다는 인상이 짙다.

해외의 사회학에서 빈곤이 얼마나 비중 있게 다뤄지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간단한 검색을 통했을 때 빈곤은 그렇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은 듯 했다. (빈곤을 포함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불평등 연구가 주요한 흐름으로 자리한 것과는 그 위치가 상당히 달랐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불평등 연구가 주류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단단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데 반해 빈곤 연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불평등 연구도 거의 대부분 통계적 데이터를 활용한 양적 연구다.

빈곤에 관한 책을 생각했을 때, 미국 매튜 데스몬드의 쫓겨난 사람들이나 한국 조은의 '사당동 더하기 25', 소준철의 가난의 문법같은 소수의 책만 떠오르는 것이, 나의 지식의 한계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한국 사회학에서 빈곤이 전혀 다뤄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독특하게도 1980년대까지의 주요 빈민층이라고 할 수 있는 부랑인에 관한 연구가 상당히 이뤄졌고, 노숙인에 관한 연구도 소수 이뤄졌다. 거의 대부분 문헌연구들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연구들이 종합되거나 보강되어 한국 국가의 빈곤 통치에 관한 통합적 기획으로 구성되지는 않았다.

한국 사회학계에서 빈곤이 기묘하게 지워져있는 모습은 마치 실제 한국에 존재하는 빈곤이 기묘하게 가려져있는 모습과 유사하다고 느껴진다. 많은 이들에게 한국은 가난했으나, 더 이상 가난하지 않은 나라로 상상된다. 불평등은 중요한 주제로 대우받지만, 빈곤은 그렇지 않다. (이것이 불평등 연구에 부당하게 많은 관심이 가있다고 오독되지 않기를 바란다.) ‘기묘함이라는 단어를 더 쓰고 싶지 않은데, 그런 감각을 느낄 수밖에 없다.

당연하게도 한국에는 빈곤이 실재한다. 곳곳에. 그러나 점차 감춰지는 모습으로. 노숙, 고시원으로 대표되는 열악한 주거와 무직, 일용직, 아르바이트, 계약직의 고용형태, 태어나서부터 가난하게 자라는 아이들.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노인들. 이들이 문자 그대로 한국의 지하 경제를 이루고 있다. 지상의 것들을 떠받치면서 말이다. 그런데 왜 연구하지 않을까. 그것이 끊임없는 고민의 대상이었다. 이 고민을 여전히 해결하지 못했기에, 나는 빈곤에 관해 공부하고 연구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 희뿌연 생각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