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쓴 것/페미니즘

예민함은 의무다

예민함은 의무다

(2015.09.15)

 

안전 이별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전 이동이라는 말도 나왔다. 이 단어들 앞에서 난 깊게 좌절했다. 감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이성 연애를 하면서 기분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관계가 틀어졌다는 이유만으로 폭력을 당해야 한다는 것을. 이별을 맞이했다는 이유만으로 집 근처로 찾아오겠다는 협박을 들어야 하는 것도, 염산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살해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껴야 한다는 것을. 지하철에서, 에스컬레이터에서, 학교에서, 화장실에서, 또 그 어디에서라도 누군가가 나를 찍고 있을지 모른다는 공포를 느낀다는 것을. 학교 화장실에 몰카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달라고 학교 본부에 요청해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이런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일상에서도, 사랑(이성연애)에서도, 또 그 어떠한 것에서도 폭력과 관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속에서 지새워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맥심 표지가 논란이 됐을 때, 어김없이 달렸던 댓글들을 기억한다. '왜 이렇게 예민하냐', '피해의식 갖지마라', '그냥 잡지 표지로 보면 되지 이걸 왜 그렇게 해석하냐' 어디선가 많이 본 댓글들. 지금까지 여성에 대한 성폭력, 성희롱, 비하, 혐오에 관한 이슈들이 논란이 될 때마다 반복되어 오던 말들. 남성의 입과 손에서 너무도 쉽게 던져진 말들.

 

그런 말을 내뱉는 남성들, 그들은 정말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단 한 번도 늦게 밖을 돌아다니는 것이 자신에게 실체적인 위협이 된 적이 없었을 테니까.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화장실에 가고, 또 그 어딘가에 갔을 때 나를 찍는 카메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을 테니까. 연애 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상대방에게 폭력을 당할 것이라고, 이별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염산을 맞거나 살해를 당할 거라는 생각도 당연히 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남성들에게 맥심 표지는 그저 '모델의 악역 특성을 잘 살린', '별로 문제적이지 않은' 것으로만 보일 테다.

 

그렇게 쉽게 던져진 참을 수 없이 가벼운 말들. '너무 예민한 거 아니냐', '피해의식 갖지 마라'. 피해의식은 진공에서 나오지 않는다. 나를 일상적으로 위협하는 공포가 피해의식을 만든다. 그것이 여성의 탓인가. 아니면 때리고, 죽이고, 몰래 사진 찍는 남성의 잘못인가.

 

모를 수 있다.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으니까.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것이 전부 당신의 탓은 아니다. 하지만 세상의 절반이 일상적인 공포에 시달린다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알아야만 한다. 그런 사회가 도대체 어떤 사회인지, 아니 '사회'라고 부를 수는 있는 곳인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나는 살인자가, 강간범이, 일베가 아니라고. 그건 일부 남성들의 문제일 뿐이라고. 나를 잠재적 가해자로 만들지 말라고. 언제나 타자를 만들어내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다. 그리고 거기서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않는다. 내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이 문제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 그리고 다시 보이는 댓글들. '왜 이렇게 예민하냐', '피해의식 갖지 마라'

 

우리는 정말 무고한가. 성별의 차이만으로 한 사회에서 특정 성이 이동과 이별에서조차도 안전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 모두는 이에 대해 무한한 책임을 느껴야 하는 것 아닐까. '내가 아니다''우리 안의 xxx' 따위가 아니라, 이 남성중심적이고 성폭력적인 사회에서 의식적/무의식적으로 혐오의 논리를, 폭력의 습관을 내면화해오고 있던 것은 아닌지. 치열하게 되묻고, 바꿔나가야만 한다.

 

공동체의 기준은 가장 예민한 사람에게 맞춰져야 한다. 공동체의 감수성이 무뎌질수록 더 많은 구성원이 불편함을 느끼고, 상처를 입는다. 더 좋은 공동체는 보다 예민해지는 것에서부터 가능해진다. 공동체의 공공선을 높이는 것은 보다 예민해지는 것, 가장 예민한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예민함은 의무다. 예민함을 조롱하는 당신. 당신이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