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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것/페미니즘

‘일베와 여성혐오’에 대한 노트

일베와 여성혐오에 대한 노트

(2015.05.09)

 

또 다시, 아니 여전히 여성혐오로부터

한 고등학생이 시리아로 떠나며 SNS에 남겨놓은 발언 때문에 실시간검색순위에 페미니스트가 올랐다. 그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일이다. ‘칼럼니스트김태훈은 그의 수작,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를 통해 페미니즘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줬다. “잘못은 장동민이 여자에게 하고, 용서는 남자가 해준다는장동민의 여성혐오 발언 논란(이게 논란씩이나 될 수 있는 이 사회에 깊이 좌절한다)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뷰티풀 군바리>를 마주하고는 그저 헛웃음만 났다.

여성혐오는 최근 떠오르는 문제는 아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문제였고, 광범하게 만연해있다. 일베는 가장 상징적인 집단이다. ‘약자로서의 남성을 내세우며 역차별을 주장하는 남성연대(양성평등연대’)도 등장했다. 대학가에서는 총여학생회, 여학생위원회 등 학생기구와 여학생휴게실 등 편의시설에 대해 남성 역차별이라는 녹슨 칼로 공격이 이어졌다. (녹슨 칼의 문제는 날카로움은 없어도, 온갖 세균이 잔뜩 묻어있다는 것에 있다) ‘남자동기단톡방에서의 음담패설은 일베로 상징되는 온라인에서의 여성혐오가 사실은 내 바로 옆에서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최근 모 대학 학과의 새터 문제처럼 여성혐오와 감수성의 부재는 여전히 일상적인 공간과 집단 속에 깊이 스며들어있다.

[뛰어난 필자들에 의해 좋은 분석과 비판이 나왔다. 다만, 여성혐오 대한 전반적인 흐름이나 고민을 나누고자 글을 썼다. 주로 온라인과 여성혐오를 묶어서 이야기하려고 했다. 온라인에서 나타나는 여성혐오는 현실세계의 것을 집약적으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여성혐오 양상의 변화를 포착하기에도 용이하다. 온라인에서 나타나는 여성혐오의 언어와 그 작동방식은 그 거친 외피를 한 꺼풀만 벗겨내면 현실세계의 그것과 거의 다르지 않다.]

 

여성혐오는 어떻게 형성되었나

여성혐오는 엄밀하게 그 시기를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다. 성녀/창녀 이분법을 통해 창녀를 호명하고, 혐오하는 것은 아주 오래된 억압의 방식이다.(이는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다) 하지만 여성은 혐오보다는 멸시와 배제의 대상에 가까웠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철저히 배제되었고, 존재를 가시화할 수 있는 공간에 속할 수 없었다.

한국사회에서 여성혐오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시점(특히 온라인 공간에서)에 대해서는 주로 1999년에 있었던 군가산점제 위헌 소송이 이야기된다. 1999년 이화여대 학생과 연세대 장애인 학생이 제기한 군가산점제 위헌 소송에 대해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을 내렸다. 헌재의 위헌 판결에는 여성, 장애인 등 비장애 남성이 아닌 사회적 약자에 대한 불평등 문제가 핵심적인 이유로 작용했다. 위헌 판결은 병역에 대한 합리적 보상 문제나 성역화된 징병제 등을 전면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기회였다.(윤보라) 하지만 이 기회는 군대 가서 고생하는 남자, 편하게 놀면서 필요할 때만 권리 주장하는 여자라는 프레임 속에서 성대립의 문제로 변질되어갔다.

군가산점제가 이대생(=꼴페미)’들의 만행으로 위헌 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이 피시통신을 통해 급격히 확산됐다. 수많은 남성들이 분노했고, 키보드 전쟁에 나섰다. 피시통신의 보급은 현실에 존재하는 여성혐오를 온라인에 집약적으로 옮겨놓았고, 여성혐오를 끊임없이 확대재생산했다. 처음 유통될 때부터 잘못됐던 팩트에 편견과 조작, 과장이 덧씌워졌다. 지금까지도 군가산점제 문제는 여성혐오의 주요한 소재이자, 군문제를 고작 가산점에나 묶이도록 만들었다.

군가산점제 논란으로 대표되는 군대 문제와 2001년 개설된 여성부(현 여성가족부 / 이하 여성부), 그리고 페미니스트(군대 문제-여성부-페미니스트)는 여성혐오를 작동하는 논리의 토대를 이루게 된다. 혐오의 사이클에서 만들어진 이미지들은 일반 여성에게 덧씌워진다. 존재 여부도 불확실한 일부 여성의 사례는 확대재생산되며 혐오를 공고히 하고, 또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개똥녀->된장녀->김치년이라는 흐름

한국사회의 여성혐오 흐름은 개똥녀->된장녀->김치년으로 요약된다. 세세하게 살펴보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것들이 논의되어야 하겠지만, 흐름을 요약하는 정도로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전까지 여성혐오는 주로 여성부, 페미니스트 등을 향했다. ‘여성부의 뻘짓 목록’(여전히 소비되고 있다), ‘깔깔깔녀와 같이 왜곡된 정보를 팩트로 가공하고, 이를 근거로 혐오를 확장했다. “하지만 2005년에 있었던 개똥녀사건은 한국사회에 최초로 등장한 온라인 마녀사냥의 원형이자, 여성혐오의 새로운 표적 집단에 일반 여성 개인까지 포함될 수 있음을 알린 징후적 사건이다.”(윤보라)

이 사건에 대한 핵심적인 지적은 개인이 공중도덕을 위반한 것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젊은) 여성이 공중도덕을 위반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의 맥락에서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제는 SNS의 확산으로 대상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영상들이 올라오기 때문이다. 다만, 2005년에는 버디버디, 싸이월드밖에 없던 시기였다. 페이스북, 트위터와 같이 대중적 접근이 가능한 단일 플랫폼이 부재했던 시기에 일반 개인의 공중도덕 위반 사례가 커다란 사회적 논란이 됐다는 것과 그 대상이 젊은 여성이었다는 것 사이에 상관관계가 존재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전에는 이와 같은 공중도덕 위반 사례가 없었는가. 있었다면 왜 그 사례들은 논란이 되지 않았고, 해당 사건은 논란이 되었는가.(더 세밀한 논의는 <일베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윤보라를 참고해보시길)

개똥녀를 이어 된장녀가 등장한다. ‘된장녀담론은 명품백을 사고,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면서 밥은 굶는 분수도 모르는 여자’, ‘남자 등골 빼먹는 여자등으로 요약된다. ‘된장녀의 소비형태(과소비, 사치 등)가 여성에게만 나타나는 것인가. 왜 여성에게만 이런 소비형태가 욕을 먹어 마땅한이유가 되는 것인가. 여성의 이미지만 부각되고, 유통되는 것에는 위계적이고 구조적인 불평등이 존재하기 때문은 아닌가. (여전히 유효한 이미지인) ‘남자 등골 빼먹는 여자는 실재하는가? ‘여자는 이래라고 말할 정도로 일반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사례인가? 이 모든 물음은 된장녀담론이 허구적이며, 여성을 타자화하고 혐오하는 불평등한 성권력관계에 기반해 있는지를 보여준다.

개똥녀’, ‘된장녀와 같은 ‘xx마녀사냥은 일반 여성도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으며, 여성에게 일상적인 자기 검열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이때까지의 여성혐오는 일베로 상징되는 이후의 흐름과는 달리 여성을 총체적으로 거부하는 모습이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자신들이 혐오하는 것은 특정 여성 집단의 문제 때문이며, 과소비나 공중도덕의 위반 등 혐오를 위한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를 찾으려고 한다. 이런 흐름은 지금까지도 성녀/창녀 이분법의 변주로 이어지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일베로 상징되는 여성에 대한 총체적인 거부가 나타났다. 정확히는 된장녀라는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가 김치년이라는 한국 여성 일반으로 확산되는 과정과 맞물려 일베가 등장한다. 이제 여성이 혐오 받아야 할 이유는 어떤 말이나 행동, 부적절한 생각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과소비를 하고, 예의가 없고, 개념이 없는 어떤 여성이 비난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여성의 종특이 원래 그렇다는 것이다. 이제 김치년이 탄생했다.

 

일베, 역차별, ‘현재의 페미니즘

 

일베와 여성혐오

일베는 여성혐오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상징이 되었다. 이전부터 존재하던 대형 커뮤니티와 일베의 가장 중요한 차이 중 하나는 여성에 대한 총체적 거부에 있다. 오유, 엠팍, 디씨 등 남성이 주 이용자층을 이루는 커뮤니티에서도 커뮤니티 내부의 분란을 막기 위해 친목질을 경계했다. 하지만 일베는 여성임을 드러내는 것 자체를 차단함으로써, 이용자들의 상징적 성별을 남성으로만한정한다. 이미 온라인상에는 여성 혐오 문화가 상당히 축적되어 있었고, 철저히 남성화된 일베라는 공간에서 이것들이 날 것 그대로 발화되며 폭발적인 생산재생산과 확산을 이루게 된다.

여성에 대한 총체적인 거부뿐만 아니라 합리적인 비판으로 남성 역차별과 현재의 페미니즘이 발명된다. 여성에 대한 총체적 거부에는 그 자체로서는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논리가 없다. 여성은 여성이기 때문에 혐오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일베에서 흔히 이야기되는 팩트들은 대부분 이들이 상상하고, 투영하는 여성혐오의 요소들로 재구성된 팩트들이다. ‘~로 대표되는 경험담, 목격담도 허구의 것이거나 왜곡, 과장된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커뮤니티 구성원들에게는 이러한 담론들이 의심 없이 수용될 수 있겠지만, 커뮤니티를 벗어나면 그 무논리성이 금방 드러난다. (문제는 생각보다 많은 남성들이 이러한 담론을 의심 없이 수용한다는 것이지만)

 

역차별받는 남성들?

여성혐오담론이 현실세계에서 합리적인 것으로 수용되기 위해서는 나름의 논리가 구성되어야 한다. 크게 남성 역차별과 현재의 페미니즘을 이야기해볼 수 있겠다. 남성 역차별은 이미 단편적이지만 광범하게 존재해오던 논리였다. 고 성재기씨와 그가 만든 남성연대는 남성 역차별이라는 무기(잔뜩 녹슬었지만 말이다)를 벼려냈다. 남성성의 위기와 맞물려, ‘약자로서의 남성을 주장하는 논리는 많은 남성들에게 내면화되고, 지지받게 된다. 특히 젊은 세대의 남성들이 남성 역차별을 적극 수용한다. IMF 이후 신자유주의화와 함께 한국사회에서 남성성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과 청년세대의 문제와 불안이 남성 역차별 전반에 깔린 정서라고 할 수 있다. 젊은 남성들의 역차별 주장은 이전 세대와는 다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가부장제 질서를 통해 여성을 규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관념적으로나마 남녀평등의 논리를 역이용하여 여성들을 비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남성 역차별은 그 자체로 혐오의 무기라는 것, 공격대상이 전혀 잘못 설정되었다는 것, 허구적 신화에 기반해 있다는 것, 사실을 호도하고 왜곡하고 있다는 것에서 총체적인 문제를 지닌다. 남성 역차별 주장이 남자도 힘드니까 우리도 봐줘요수준이라면 그냥 그렇게 넘어갈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남성 역차별은 너무도 명확하게 혐오의 무기이며, 실제로 혐오를 위해 쓰이고 있다. 남자들 힘들다. 근데 여자들도 힘들다. 다 같이 힘들다. 남성이 힘든 이유가 꼴페미여성부가 여권만 주장해서 생겼다는 주장은 상당히 구린 신화다. 총체적인 구조의 문제가 여성의 이기심이라는 신화로 치환되면서 정작 공격해야 할 것은 공격하지 못하고, 허수아비만 때리게 된다. 문제가 해결될 리 만무하다. 사회 구성원들이 정부와 구조를 비판하고 변화를 요구할 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이는 너무나 쉽게 성대립으로 변질된다.

마지막으로 남성 역차별을 주장하면서 제시하는 논리들은 왜곡되거나, 과장되거나, 거짓인 것이 대부분이다. 사회 전체적인 차원에서 여러 지표를 살펴봤을 때도 남성이 역차별을 받는다고 주장할 수 있는 지점은 극히 일부 영역에 국한된다. 특히 젊은 남성들이 경험하는 역차별 문제의 거의 대부분은 징병제 군대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표에서 여전히 성차는 강력한 불평등으로 작용하고 있다. (단적으로, 한국의 성별임금격차는 OECD 국가 중 최상위다) 또한 일부 영역에서 정책의 문제로 역차별 문제가 발생했다면 해당 문제의 시정을 요구하면 된다. 더군다나 군대 문제는 여성을 비난함으로써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국가에게 요구하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다. 진위여부와 관계없는 낱개의 사건들을 묶어서 이게 다 여자들 때문이니까 이제 여성정책 중지하라고 주장하는 건 너무 터무니없지 않은가.

 

현재의 페미니즘의 발명

현재의 페미니즘은 주로 남성 지식인(이렇게 표현하는 게 적절한지 모르겠다)의 고상한 여성혐오에 이용된다. ‘과거의(혹은 진짜) 페미니즘은 좋은 목적으로 시작했는데, ‘현재의(혹은 거짓) 페미니즘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최근 김태훈씨가 자신의 칼럼에서 잘 보여줬듯이 말이다. ‘일반인들처럼 원색적으로 비난하고 싶지는 않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인주장을 통해 비판하고 싶다는 남성 지식인의 욕망의 산물인 것일까.

페미니즘은 분명 여성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출현했다. 그 결과 많은 부분에서 여권 향상 이뤄졌다. 하지만 여권 신장이 페미니즘이 주장하는 전부가 아니다. 특히나 현대에는 더욱 그렇다. 여성의 권리만을 신장시키자는 요지의 논문이나 자료를 본 적 있는가? 그것이 어느 정도의 지지를 확보했는가? ‘현재의 페미니즘은 이론적 작업도 존재하지 않는 일그러진 환상이다. 페미니즘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비판하며 억압받는 모든 약자를 위해 공부하고, 행동하는 학문이며, 남성중심적인 세계를 재구성하려는 하나의 (중대한!) 시도다.

남성 역차별이나 현재의 페미니즘과 같은 이야기를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논리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모두 비합리적이거나 허구적인 것이 아니며, 이 논리를 내면화한 개인에게는 이러한 주장들이 충분히 나름의 합리성과 논리성을 갖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지점이 문제인지를 정확하게 논박해내야 한다.

 

무엇이 여성혐오를 만드는가

여성혐오에 대해서는 많은 해석이 존재한다. 무엇이 여성혐오를 만드는지에 대해 묻는다면 수많은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모두를 열거할 수 없기에 자주 이야기되는 몇 가지 견해들만 나눠보고자 한다.

 

남성성의 위기와 여성혐오

남성성의 위기와 여권의 신장은 주로 이야기되는 견해 중 하나다. 서구를 기준으로 했을 때 근대 국가는 영토 국가이기보다는 노동력을 중시하는 인구 국가이다. 근대 권력의 핵심은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이며, 이 권력이 생산재생산하고, 관리하려는 노동력으로서의 인간은 남성이다.(푸코) 여성에게는 재생산이 맡겨졌다. 초기 자본주의를 주요하게 지탱한 노동력으로서의 여성과 아동은 언제나 보충역 취급을 받았다. (아동의 노동은 법적으로 금지됐지만 여성의 노동은 여전히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주요한 착취 대상이며,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더욱 심화된다고 할 수 있다) 근대 국가에서 남성 노동력은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근대 국가는 남성 노동자를 경제적 주체로 호명해야만 했다. 경제적 주체로 남성 노동자를 호명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대다수의 남성은 정치적경제적 주체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전 지구적으로는 1970년대 이후, 한국에서는 IMF 위기와 더불어 자본주의의 헤게모니가 금융 자본으로 이동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노동은 쓸모없는 것이 되었다. 자본의 증식은 더 이상 생산에 주요한 기반을 두지 않게 되었다. 또한 세계화가 이뤄지면서 자본은 더 이상 단일 국가 내부의 노동에만 의존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금융위기와 더불어 금융자본으로의 헤게모니 전환이 일어난 후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로 대표되는 가부장제와 남성성은 추락하기 시작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에 의하면 국가는 더 이상 노동력 재생산을 국가 정책의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국가는 이제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탈락시켜 쓰레기로 만들고, 노동의 영역으로 편입되지 못한 사람들에게 네가 왜 쓰레기이고 잉여인지를 납득시키는 작업을 진행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페미니즘 운동으로 여권 신장이 이뤄지고, 여성이 공적인 공간’, ‘남성적 일자리에 진출하기 시작한다. 여성이 남성적 일자리에 진입함으로써 견고하게만 느껴졌던 남성성이 사실은 매우 취약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남성들은 당연하게 정체화해오던 경제적, 정치적 주체로서의 자신을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한다. 경제적으로 IMF위기와 신자유주의 금융화 이후 노동력의 필요가 감소하고, 노동시장이 비교적 성적으로 평등해지면서 경제적 주체로서의 남성의 지위가 탈각되고 양극화된다. 대다수의 남성은 경제적 주체가 되지 못하고, 따라서 더 이상 정치적 주체로 인정되지도 않으며, 본인들도 자신을 주체로서 정체화하지 못한다. 이들은 잉여백수가 된다.

문제의 원인이 구조에 있다는 것은 명확해 보인다. 현재의 구조에서는 양극화의 윗부분에 존재하는 극히 일부를 제외한 모두가 고통 받는다. 하지만 남성들에게 남성성의 위기와 여권의 신장은 상대적으로 대비되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젊은 세대의 남성들에게는 여성의 고등교육 진학률의 증가, 일자리 진입 상황에서의 불평등 감소, 그리고 군대 문제 등이 여성을 으로 설정하고, 혐오하게 만드는 사회적 조건으로 기능하게 된다.

 

루저문화와 여성혐오

남성성의 위기는 일베, 디시 등 온라인 커뮤니티의 루저문화와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여기서 명확하게 해야 할 것은 이들이 루저인지 알 수 없으며, 그것이 중요하지도, 타당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들이 루저문화를 형성하고, 이 프레임 안에 있다는 것이다. “남성들의 루저문화는 규범적 남성성의 해체에 집중한다. 남성들은 루저문화가 과거 헤게모니적 남성성과 현재 찌질한자신과의 불일치를 적극 전시함으로써, 불안을 극복하고 남성성의 의미 자체를 미완성인 상태로 열어둔 채 협상에 임할 수 있을 것이라 봤다.”(안상욱) 하지만 적어도 일베에서는 이러한 시도가 실패했다. 과거 남성성과의 불일치가 장기간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들의 패배감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 극단화하는 방식으로 드러났다.’(윤보라)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루저문화가 일반으로 확산되는 것도 볼 수 있다. 정태영 현대카드 사장의 여성비하 트윗은 루저문화가 하층 남성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닌 하나의 문화이자 프레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전에는 인디씬에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과 같은 아티스트에 의해 B급 정서로 노래되었던 루저, 이제는 빅뱅의 곡 제목으로까지 쓰이는 이 시대가 무언가 징후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과한 것일까.

 

호모소셜과 여성혐오

여성혐오에 대하여 주요하게 살펴볼만한 또 다른 논의는 우에노 치즈코가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에서 소개한 이브 세지윅의 호모소셜에 관한 이야기다. 호모소셜에서 남자가 자신의 성적 주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이용하는 장치가 바로 여성을 성적 객체화하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여성의 성적 객체화를 서로 승인함으로써 성적 주체 간 상호 승인과 연대가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호모소셜에서는 필연적으로 호모포비아가 일어난다. 동일화의 대상인 타자(주체)를 동시에 성적 욕망의 대상(객체)으로 삼는 것, 즉 호모소셜 내에서 남성이 다른 남성에 의해 성적으로 객체화될 수 있다는 위협은 호모소셜의 유지에 치명적인 위험 요인이다. 따라서 호모소셜리티는 여성혐오에 의해 성립되고 호모포비아에 의해 유지된다. “서로를 남성으로 인정한 이들의 연대는, 남성이 되지 못한 이들과 여성을 배제하고 차별화함으로써 성립한다. 호모소셜리티가 여성의 차별뿐만 아니라 경계선의 관리와 끊임없는 배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남성됨이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가를 역으로 증명한다.”

현대 사회의 양극화로 상층 남성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호모소셜이 유지될 수 있지만, 하층 남성들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호모소셜의 필수요건으로서 성적 객체화할 실제의 여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가능성에 대해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포르노그라피 이미지와 성적인 이야기를 통해 실재하지 않는 여성을 객체화하는 방식을 사용함으로써 유사-호모소셜을 욕망하는 모습을 보인다.

 

성대립은 어느 자물쇠에도 맞지 않는 열쇠다

 

여성혐오의 여러 문제 중 꼭 지적하고 싶은 것은 여성혐오가 구조의 문제를 성대립으로 치환함으로써 문제의 해결을 요원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군대 문제와 여성부에 관한 논의가 그렇고, 대학사회에서는 여학생기구와 여학생 편의시설에 대해서 그렇다.

병영 환경 개선, 병역에 대한 보상 문제 등의 군대 문제는 구조적 차원에서 국가의 역할을 요구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국가가 군가산점제 논란을 유지하는 이유는 아무런 비용을 들이지 않고, 국가의 책임을 성대결의 장으로 떠넘길 수 있기 때문이다. 군대 문제는 <뷰티풀 군바리>류의 여자도 군대 가야 한다는 주장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이러한 류의 이야기의 또 다른 문제는 이미 군대 내에 적지 않게 존재하는 여성을 모두 비가시화 한다는 것이다) 군대 문제에 있어서 여성은 남성의 적이 아니라, 함께 변화를 요구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여성부에 관한 혐오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여성부 정책의 접근 방향과 실효성에 대한 성찰, 정책이 갖는 의의 등을 논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젠더 의제를 요구해야 한다. 여성부의 정책을 합리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여성부의 만행같은 것으로 왜곡하는 것 역시 누구에게도 좋을 게 없다. 성차의 문제가 여전히 강력하게 불평등으로 작용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이만 됐으니여성부를 폐지하자는 주장에도 전혀 동의할 수 없다.

대학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역차별이라든지, ‘존재 이유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학생기구나 편의시설을 없애자는 논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모르겠다. 많은 학교에서 여학생기구는 여전히 유효하게 활동하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여학생기구가 더욱 갖춰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요구하면 된다. 그저 여학생기구라는 이유만으로 학생기구를 통째로 폭파시켜버리고자 한다면 이토록 비합리적인 사고방식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마찬가지로 여학생편의시설이 역차별이니까 없애달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남학생편의시설을 만들어달라고 주장하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지 않은가.

 

일베와 여성혐오를 넘어서

 

일베라는 알리바이

마지막으로 평소 고민하고 있던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마치고자 한다. 어느새 일베와 여성혐오는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일베도, 여성혐오도 너무나 커다란 것이 되어서 다른 것을 생각하기 어렵게 되었다. 클리셰 같지만 우리는 일베와 여성혐오 너머의 무엇을 봐야 하는 것 아닐까.

일베는 여성혐오의 거대한 상징이다. 동시에 일베는 여성혐오의 알리바이가 되었다. 일베가 여성혐오를 이야기하면서 주요하게 짚어야 할 대상인 것은 맞다. 일베에서는 지금도 엄청난 수의 혐오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SNS를 비롯해 온라인을 부유하는 많은 여성혐오 자료들이 일베에서 생산재생산되거나 확산유통된 것들이다. 더욱이 일베에서 사용하는 언어의 과격함도 문제가 된다.

하지만 일베 이전에도 여성 혐오는 광범하게 존재해왔다. 적지 않은 남성들이 여기에 동참했다. 일베의 여성혐오가 그렇게 폭발적으로 가능했던 것은 이미 이전에 사회에 여성혐오 문화가 축적되어있기 때문이었다. 일베에서 나타나는 여성혐오의 언어와 그 작동방식은 그 거친 외피를 한 꺼풀만 벗겨내면 현실세계의 그것과 거의 다르지 않다. “일베 현상은 개인이 감내해야 하는 불안과 공포의 임계치가 한계에 달했을 때 여성을 전면적으로 타자화하는 방식으로 해소해 온 한국사회의 단면이다.(윤보라)

그런데 수많은 남성들이 일베에 모든 죄를 전가함으로써 자신의 알리바이를 만든다. 소위 진보사이트에서도 여성혐오는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장동민의 여성혐오 발언이 논란씩이나 되는 과정에서 이를 똑똑히 목격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일베나 디씨에서만 여성혐오가 이뤄진다고 주장하는 것은 책임 떠넘기기에 불과하다. “서둘러 일베를 루저 혹은 상종 못할 여성혐오자로 낙인찍고 봉합하려는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가 일베라는 속죄양을 원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다.”(윤보라)

모 대학들에서 발생한 새터 사건과 단톡방 사건 소식에 대하여 일부 사람들이 쟤네 일베라 저렇다라는 요지의 댓글을 단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 일베를 거대한 상징으로 타자화함으로써 자신의 혐의를 벗거나, 문제의 원인을 일베로 떠넘김으로써 더 이상의 고민을 멈추는 경우를 흔히 목격하게 된다. 일베가 문제인 것은 맞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면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더욱이 현실의 공동체에서 문제가 일어났을 때 문제적인 구성원이 일베를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하필 어떤 시기에, 어떤 대학에, 어떤 학과에 단체로 미친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일어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공동체 내부에 여성혐오, 성폭력, 불평등한 성 권력관계의 문제가 만연하고, 이것이 전혀 문제시 되지 않는 분위기가 이런 사건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공동체의 문제에 대해 문제제기가 이뤄지고, 반성폭력성평등 문화가 정착될 수 있도록 공동체 내외부에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문제 제기와 성찰 없이 비정상적인 괴물을 제물로 삼아 탈출하는 것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혐오라는 정동에 대하여

혐오 그 자체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손희정씨가 한국여성민우회에서 강의하신 <된장녀, 김치녀에서 무뇌아적 페미니스트까지>에서 얻게 된 고민이다. 어느 사회에서 하나의 감정이 두드러지게 식별되기 시작할 때가 있고, 그때 그것이 무엇 때문이고, 왜 그러한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1940~50년대 한국사회를 추동했던 감정은 증오와 분노였고, 이는 민족주의 강화와 관련되었다. 1960~70년대에는 희망으로 추동된 열정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정동이었다. 그리고 21세기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정동은 혐오다. 우리는 여성, 외국인, 성소수자에 대한 강력한 혐오를 목격하게 된다. 혐오는 단순히 개인적이거나 감정적인 차원이 아닌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차원의 문제다.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고, 경계 짓기 위한 방법으로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던 혐오라는 정동이 왜 21세기의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정동이 되었는가. 신자유주의의 일반적인 어떤 조건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혐오에 기대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따라서 여성혐오에 대해 고민하는 것 역시 중요하지만, 그것을 넘어 혐오 일반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고민들이 남게 되었다. 또한, 우리가 그동안 혐오자들에 대하여 마찬가지로 그들을 혐오하고 배제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던 것이 과연 유효한 전략이었는가. 이러한 대응 방식이 혐오라는 거대한 정동을 유지하는데 기여했던 것은 아닐까. 과연 우리는 어떻게 혐오라는 정동을 가로질러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