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 이상길. (2018). 『아틀라스의 발』. 문학과지성사. 들어가며, 1-3장, 8-9장
(강조는 정리자 / *은 문장 수정)
1. 부르디외의 지적 도정 - 10년 단위의 몇 가지 국면
1) 1950년대~1960년대 초: 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을 배우고 알제리와 베아른에서 인류학적 현지조사를 수행한 지적인 수련기(39)
-『독신 상태와 농민 조건』(1962): 고향인 베아른의 노총각 농민의 증가와 결혼 시장의 변화에 관한 현지조사. 알제리와 베아른 사이에 많은 유사성이 있다고 느껴, 프랑스 사회를 인류학적 시선으로 분석. 하비투스 개념을 처음 사용(Bourdieu, 2992a: 1부). (51)
-1960년대 초반 릴과 파리를 오가며 베버의 종교사회학에 관한 강의를 했고, 그 과정에서 장 개념을 창안한다(Fritsch, 2005; Schultheis, 2005: 360; Hirschhorn, 1988) (52) (각주 16)
2) 1960년대: 유럽사회학연구소를 주도하면서 체계적인 경험조사와 공동 연구로 많은 성과를 내놓은 시기다.(39) 그는 1960년대 중반까지 다섯 건의 대형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은행의 고객층 관리 방식, 대학 학업성적의 불평등을 조건 짓는 사회경제적 요인들, 사진의 사회적 활용, 미술관 관람이라는 문화적 실천의 결정 요인들, 전후 급속한 경제성장의 사회적 효과 등(Lebaron, 2004: 119~122). 이러한 경험적 연구는 책이나 보고서의 출간으로 이어졌으며, 나아가 부르디외가 장차 구축할 사회 이론의 실증적 자양분이 되었다.(54)
-알제리 연구서들, 문화사회학 분야의 『중간 예술』, 『예술 사랑』, 교육사회학 분야의 『상속자들』, 『재생산』 등 (39)
-『상속자들』(1964). 장-클로드 파스롱과의 첫 번째 공저. 2차 대전 이후 프랑스 공교육 정책이 변화하고 (수적으로 급증한) 대학생들의 문화와 생활양식 역시 변모하던 때 나온 저작. 이 책은 대학생들의 학업 성취도의 격차를 낳는 주요인이 경제적 불평등보다는 출신 환경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상속받은 교양, 지식, 태도와 같은 문화자본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55)
-『재생산』(1970). 두 저자가 1960년대에 함께 수행한 교육사회학 연구들의 결과를 요약하고 이론적으로 급진화한 저작. ‘상징폭력의 일반 이론’을 구축하면서, 교육 행위는 그 자체로 철저히 상징폭력이며 이를 통해 교육제도는 사회질서의 유지에 봉사한다.(61)
3) 1970년대: 교육문화사회학연구소를 기반으로 학술지 『사회과학연구논집』(이하 『악트』)을 창간하고 실천이론과 장이론의 체계를 정립해나간 시기. 『구별짓기』, 『실천감각』 (40)
-『실천이론 개요』(1972). 알제리 카빌리 지방에서의 민족지 연구 세 편을 묶고 이론적 종합을 덧붙임. 이 책에서 그는 사회적 행위자의 실천이 무의식적인 규칙이나 기계적인 법칙에 대한 단순한 복종의 산물이 아니라, 생성적인 하비투스와 의식적·무의식적인 전략의 결과라는 점을 역설한다.(62)
이러한 실천이론의 한편에서, 그것과의 유기적인 연계 속에서 ‘장이론’을 발전시킨다. 1960년대의 예술사회학 연구와 베버의 종교사회학에 대한 독해로부터 나온 장 개념은 1970년대에 패션, 문학, 과학 등 다양한 문화 생산 장에 관한 연구 논문들로 결실을 맺는다.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부르디외의 연구는 점점 각종 장의 발생과 구조, 특수성과 일반성을 규명하는 형식을 띠게 된다.(62)
-『구별짓기』(1979). 1963~75년 중에 수행했던 프랑스인의 계급별 문화 취향과 생활양식에 대한 조사연구들을 이론적·경험적으로 집대성한 저작. 이 책에서 부르디외는 분화된 계급 분파들에 조응하는 차별적 취향과 생활양식들이 존재하며, 그로부터 발생하는 문화적 지배 효과가 불평등한 정치경제적 권력관계의 재생산에 이바지한다고 주장한다.(65)
-『실천감각』(1980). 『실천이론 개요』(1972)를 개작한 책.(66) 인류학적 현지조사들(카빌리와 베아른)을 기반으로 이론적 야심을 가장 전면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여기서 부르디외는 사르트르가 대표하는 주관주의와 레비-스트로스가 대표하는 객관주의를 지양하는 실천론의 입장을 정립한다. 그는 과학으로서의 인류학(혹은 사회학)이 학문적 실천과 그 도구, 특히 연구자가 연구 대상과 맺는 관계를 다시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 있어야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한편, 하비투스, 전략, 상징자본, 상징폭력 등으로 이루어진 고유한 행위 이론을 가장 완성된 형태로 제시한다. 그것은 구조-개인, 객관주의-주관주의, 거시-미시라는 허구적이고 스콜라적인 이분법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변증법적 해결책을 제안한다.(67)
4) 1980년대: 콜레주드프랑스 교수. 『호모 아카데미쿠스』와 『국가 귀족』을 통해 지식인 사회학과 정치사회학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 (40)
-『강의에 대한 강의』(1982). 콜레주드프랑스 취임 강연문. ‘과학으로서의 사회학’이라는 기획을 재확인하면서, 그것이 ‘탈신비화’와 ‘계몽’의 편에 선다는 점을 확인한다. 또한 그는 ‘객관하는 주체의 객관화’와 ‘사회학의 사회학’, ‘성찰성’이야말로 사회학이 과학성을 획득하기 위한 선행 요건이라고 주장한다.
-『말하기의 의미』[상징폭력과 문화재생산](1982). 언어와 분류 활동의 정치적 의미 탐구. 특히 (구조)언어학의 언어중심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언어가 의사소통의 수단인만큼 권력 행사의 도구라는 점을 강조 (69) 후에 계급과 집단 형성의 문제를 다룬 논문들을 더해 『언어와 상징권력』(2001)이라는 증보판으로 재간 (70)
-『국가 귀족』(1989). 프랑스 고등교육 체계의 최상위 부문을 이루는 그랑제콜 장의 구조와 기능 작용을 분석하면서, 그것이 행정 관료와 대기업 경영자, 지식인 집단들을 포괄하는 지배계급의 재생산에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탐구한다. 그러면서 다수의 권력 형식이 공존하고 경쟁하는 선진사회에서 지배의 노동 분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논의한다. 이 책에서 부르디외는 교육제도와 지식인 문제를 다시 다루면서, 본격적인 국가사회학·정치사회학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그는 국가가 ‘물리적 폭력의 정당한 독점체’라는 베버와 엘리아스의 정의에 ‘상징폭력의 정당한 독점체’라는 정의를 추가한다. 이는 국가가 우리를 장악하고 지배하는 근본적인 메커니즘은 정치 선전과 이데올로기의 주입, 억압기구에 의한 겁박과 통제가 아닌, 일상적인 학교교육을 매개로 한 정신구조 자체의 틀짓기라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부르디외의 국가론은 1989~92년에 이루어진 콜레주드프랑스 강의의 발간을 통해 한층 선명한 모습을 드러내기에 이른다(Bourdieu, 2012).(71)
5) 1990년대: 현실 정치에 다양한 방식으로 개입하면서 참여 지식인으로서 명성을 공고히 구축한 시기. 프랑스의 신자유주의화에 대한 비판적 연구서들: 『세계의 비참』, 『경제의 사회적 구조』 / 자신의 사회 이론과 사회학적 인간론을 정리한 저작들: 『예술의 규칙』, 『파스칼적 명상』 / 『과학의 과학과 성찰성』, 『자기분석에 대한 초고』 (40)
-1990년도 초 부르디외는 지적 작업에서 중요한 변화의 계기를 맞는다. 1960년대 이래 수행했던 경험조사의 자원을 소진한 그는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사이에 국가기관의 지원 아래 두 건의 대규모 조사연구에 착수한다. ①국립예탁원이 후원한 중하층계급 심층 인터뷰, ②국립가족수당금고의 후원을 받은 주택시장 연구. 각각 『세계의 비참』과 『경제의 사회적 구조』로 발전.
-『예술의 규칙』(1992). 문화 생산 장에 관한 이전의 논문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재구성한 장이론의 결정판. (72)
-『세계의 비참』(1993). ‘조건의 비참’만이 아닌 ‘위치의 비참’, ‘집단적 비참’만이 아닌 ‘개인적 비참’을 문제 삼으면서 국가와 대의민주주의 제도의 책임 방기를 질타한다. 그는 또 사회적인 것과 신체적인 것을 긴밀히 연계시키면서, 사회과학이 폭력, 빈곤, 억압과 같은 인간적 참상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Kleinman, 1996).(75)
-1995년 가을 총파업 이후 정치 참여를 가시화. 『텔레비전에 대하여』(1996), 『맞불』(1998), 『맞불2』(2001) (76)
-『파스칼적 명상』(1997). 성찰적 인간학이라는 궁극적인 기획을 철학적 전통 속에 위치시키고 논의하는 저작. 자신이 파스칼, 스피노자, 라이프니츠로 이어지는 비데카르트적 합리주의의 노선에 서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하면서, 상징권력의 사회학이 전제하는 철학적 인간론 내지 사회적 존재론을 상세히 전개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사회 세계에 의해, 사회 세계 안에 사로잡혀 있는 고통받는 존재이며, 자기 자신과 세계의 결정 요인들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만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 책에서 부르디외는 자기 사회학과 파스칼의 철학이 공명하는 주요 주제들(다양한 권력과 층위들의 통약 불가능성, 제도와 위계의 관습성과 자의성, 믿음과 상징적인 것의 중요성 등)을 성찰하는 한편, 지식인들이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스콜라적 관점’을 급진적으로 비판한다.(78)
-『경제의 사회적 구조』(2000). 장이론에 기초한 경제사회학의 가능성을 모색한 저서. 프랑스의 개인주택 시장 형성에 대한 구체적인 경험연구를 기반으로, 주류 경제학의 가정과 달리 경제적 실천은 그 자체로 사회 세계에 ‘배태되어’ 있으며, 장과 하비투스 개념을 통해서만 온전히 분석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고전 경제학 담론의 추상성과 보편주의를 비판하는 한편, 신자유주의 경제를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서 나온 사회적 구성물로서 철저히 상대화한다.(78)
-『과학의 과학과 성찰성』(2001), 『독신자들의 무도회』(2002), 『자기분석에 대한 초고』(2002)
-부르디외에게 재귀성(“동일한 대상으로 집요하게 되돌아가기”)은 연구 대상에 대한 연구자의 주관적·객관적 관계를 더욱 완전하게 객관화할 수 있는 기회로서 커다란 중요성을 갖는다. 그는 사회과학에서 지식의 진보는 무엇보다도 인식 조건에 대한 인식을 요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79)
2. 부르디외의 지적·학문적 하비투스
부르디외에게 자기 성찰성이란 ··· 평생에 걸친 주제이자 방법이기도 했다.(100) 그러한 ‘자기’의 사회학은 철저히 ‘자기로부터 출발해 자기 너머로 나아가는 지적 운동’ 속에서 이루어졌다. 부르디외는 자기에 대한 연구가 가져다줄 수 있는 장점들(연구 대상에 대한 개인적 지식과 친숙성, 연구에 대한 주관적 몰입을 이끄는 파토스 등)을 취하는 한편, 사회학적인 대상의 구축을 통해 자기에 대한 관심을 타자로, 외부 세계로 확장시켜나갔다. *‘사회학적 객관화 도구들’이 필수 불가결했던 장치였다(다양한 자료 수집과 분석 방법). 부르디외의 사회학에서는 ‘자기’가 중요한 만큼이나 ‘객관화’의 계기도 중요하다. 그의 지적 하비투스는 거의 강박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자기에 대한 ‘사회학적 객관화를 지향했다.(101) 부르디외는 자기를 객관화하기 위해 사회과학을 택했고, 그 안에서도 다시 ‘비판적인 동시에 과학적인’ 사회학을 지향했다.(102) 부르디외의 ‘자기에 대한 사회학’은 과학을 자처하면서도, 주관적 진실을 성찰적으로 그 안에 포괄함으로써 더 강한 진실성(혹은 과학성)을 확보하는 고유한 전략을 구사했다.(104)
2) 연구 실천의 경계들에 대한 위반
부르디외는 대립 범주들을 지양하는 실천을 통해 그러한 구분 자체가 의미 없음을 증명하고자 했다.(104) ··· ‘이론적-경험적’의 대립쌍에는 ‘보편적-맥락 구속적’이라는 긴장이 잠재해 있다. 그는 프랑스라는 맥락에 밀착된 연구들을 수행함으로써 그것들의 성과와 한계를 분명히 하는 동시에, 그에 바탕을 두고 구축한 이론은 상이한 맥락과 시대에 적용 가능한 초맥락성과 초역사성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이론과 경험연구를 긴밀히 결합시키는 부르디외의 스타일은 가깝게는 바슐라르-캉길렘의 인식론적 과학사의 유산을 드러내고 있으며, 멀리는 뒤르켐 사회학의 전통을 되살리는 것이다.(109) 부르디외는 ‘상이한 영역 간 구조적 상동성’이라는 구조주의적 관념을 일종의 작업가설처럼 수용하고 있었으며, 다양한 분야와 대상에 대한 경험적 분석을 상동성을 검증하는 중요한 계기로 삼았다. 그의 이론이 갖춘 일반성은 그와 같은 기반 위에서 획득한 속성이었다.(107)
3) 철학과 사회과학의 융합
(‘사회학적 철학’이자 ‘철학적 사회학’이라는 양면성) (110)
부르디외는 철학에 대해 지극히 실용적인 관계를 맺었다. 철학은 경험연구의 방향성을 잡고 실제 조사에서 떠오른 구체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지적 자원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부르디외가 자기 연구를 위치 짓는 방식이 매우 이론적이고 철학적이었던 흔적 역시 적지 않다. 부르디외가 수행한 인류학적·사회학적 작업은 철학적 문제의식이나 지식과 분리 불가능하며, 스스로 자기 연구의 발견과 의의를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언제나 철학적인 지형 안에 자리 매기고자 했다. 2(111)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철학적 사회학 혹은 철학과 사회학의 중첩적인 존재 양식은 뒤르켐 이래 프랑스 사회학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부르디외는 뒤르켐이 그랬듯이 사회학의 고유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철학에 도전하는 전략을 취했다(Broady, 1997: 97-98; 김경일, 1995) 이 전략은 이중적인 양상을 띠었다. 부르디외는 ①철학에 대한 사회학을 통해 철학자들의 스콜라적 관점과 철학 텍스트의 보편적 권위를 공격하는 한편, ②자신의 사회학은 그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형태의 철학을 실천하는 방식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회학적 철학‘의 기획은 ’과학으로서의 사회학‘이라는 관념에 의존하는 한편, 전통적인 형식의 철학들(특히 정치철학)을 자기 안에서 해소하려 했다는 특징을 지닌다.(112)
*철학 담론에 대한 부르디외의 비판에는 (구체적인 대상에 따라 조준점들이 조금씩 달랐지만) 강단철학의 전통에 내재하는 ‘스콜라적 관점’이라는 일관된 초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현실의 시간적·경제적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어떤 대상을 사유하는 데서 생겨나는 특수한 시각을 말한다. ··· 이는 학문의 사회적 기초이자 이성 발전의 역설적인 원동력일 수 있지만, 여러 가지 인식론적 오류를 낳는 근원이 된다. 이를테면 삶의 현실과 동떨어진 질문들에 집착하게 만든다거나, 경험과 무관한 이론주의적 이론의 공허한 메타담론을 부추긴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저자와 텍스트를 곧잘 물신화하는 철학의 관성 또한 스콜라적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부르디외는 스콜라적 편향에서 비롯하는 잘못된 이분법들의 지양, 사유의 정신적·사회경제적 가능 조건에 대한 성찰과 객관화, 무엇보다도 경험에 근거한 연구를 강조한다.(400)
*부르디외가 도모한 철학과 사회과학의 융합은 정치철학을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폄하하는 한편, 사회과학적 지식에 기초한 유토피아적 현실주의라는 정치적 실천 원리를 특권화함으로써 또 다른 정치철학적 질문들을 억압하거나 봉쇄하는 결과를 낳았다.(114)
4) 이분법적 사유 범주들의 지양
*이항 대립적 사유와 접근에 대한 부르디외 사회학의 비판은 소극적인 거부의 수준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인 재조합과 한 단계 더 나아간 종합의 수준을 지향했다. 그는 자신의 사유 방식을 “절충적이면서도 고도로 선별적인 성향”에서 말미암은 “성찰적 절충주의”라고 표현한 바 있다(Bourdieu, 2004a: 90; Bourdieu, Schultheis & Pfeuffer, 2011: 118). 부르디외에 의하면 “‘절충적’이 된다는 것은 선택하는 것, 즉 선별적인 방식으로 취하는 것”이다(Bourdieu, 1999b: 18).(117)
이를테면 부르디외는 공허한 이론주의만큼이나 맹목적 실증주의 역시 지양해야 할 지적 편향이자 오류로 보았다. 그에게 스콜라적 이론과 실증주의 방법론은 가짜 대립을 통해 공생하는 “인식론적 쌍”에 불과하다(Bourdieu, 1988b: 774-775). 3(408)
5) 집단적 작업으로서의 연구 실천
3. 부르디외 연구의 특징과 평가
1) 부르디외 연구의 특징
부르디외가 일생에 걸쳐 실천한 연구 노동은 ‘지배 체제에 대한 비판’과 ‘사회학의 과학적 정립’으로 특징지어진다. *과학적으로 엄밀한 비판을 지향하고, 비판과 사회과학을 철저하게 결합하고자 한다.(81) 이러한 기획의 밑바탕에는 사회학자 개인의 성향과 교육 배경뿐만 아니라, 프랑스적이고 세대적인 특수성 역시 자리하고 있다. ①사회체 내에 스며들어 있는 온갖 세력 관계에 대한 저항은 68세대 전반의 지배적인 에토스와도 무관하지 않다. ②‘권력 비판’은 이 세대 지식인들의 공통된 중심 주제이자 관심사였다. ③사회학을 과학화하려는 노력은 당시 프랑스 사회학의 지적 취약성과 학문적 위계 내에서 낮은 지위라는 사회적 맥락, 과학사적 인식론과 구조주의의 영향에서 비롯한 ‘과학’에 대한 세대적 강박이 적지 않게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82)
부르디외 과학의 주된 특징은 크게 두 가지다.
①일상언어와의 단절: 부르디외에 따르면 “사회 세계”는 말을 놓고 벌이는 투쟁의 장소이다. 말이 중요한 이유(또 종종 폭력적인 이유)는 그것이 대개 무언가를 하기 때문이며, 말(더 일반적으로는 표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이미 사물을 변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의 중심 문제는 말이다“(Bourdieu, 1987a: 69).(401) *계급 지배는 언어를 통해서도 이루어지며, 현실을 상징적으로 구성하는 과정에서 이용하는 일상언어가 기성 질서의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추인하고 자연화하는 효과를 생산한다.(398)
사회학적 사실이나 대상은 단순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학자에 의해 선택되고 구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성 작업을 포기하고 모종의 객관성이나 중립성의 외양 혹은 환상에 사로잡혀 어떤 사회 현상을 ‘주어진 그대로’ 자신의 연구 대상으로 취한다면, 그 대상의 근원에 있는 사회적 메커니즘을 간과하고 재생산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129) ··· 그러므로 과학은 일상언어와 단절한 개념들의 정확하고 체계적인 사용을 통해 ‘당연한 것’으로 주어진 세계상에 저항해야만 한다.(398) 진정한 사회학자라면 어떤 대상에 대한 지배적 표상들에 맞서 과학적 관점 위에서 대상을 새롭게 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이때 그의 관점은 무엇보다 “관점에 대한 관점”이 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Bourdieu et al, 1993: 925). 즉, 사회학자는 사회 세계에 대한 지식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편향성이 갖는 무게를 끊임없이 질문하지 않을 수 없으며, 자기 사유의 한계와 사회적 결정 요인들을 알기 위해 사회학적 수단을 이용한다. 그는 연구 대상의 구성적 속성, 그것이 함축하는 자신의 관점, 그 관점을 발생시킨 자신의 사회적 위치, 그리고 자신의 구성 작업이 생산하는 효과를 가급적 완전히 장악하고 통제하려 애써야만 한다.(129) (각주1)
지식인은 세계를 구성하는 상징권력을 행사한다. 이러한 권력이 계급 지배와 사회적 투쟁의 핵심에 있는 만큼, 지식인은 자신이 권위를 가지고 말하거나 글을 쓸 때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지, 실재에 제대로 근거를 두지 않은 말하기와 글쓰기의 정치적 효과는 대체 무엇인지 비판적으로 성찰해야만 한다.(402)
②성찰성: 부르디외가 말하는 성찰적 사회학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띤다. 첫째, 사회학자가 한층 객관적인 지식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위치와 관점에 대한 사회학적 성찰이 필수 불가결하다.(23) 둘째, 이렇게 획득된 과학적 지식은 공론장에 되돌려지면서 구성원들의 성찰성을 증진시키고 해방을 가져오는 데 이바지할 수 있다. 사회학은 지배 체제를 탈신비화하고 각종 구조적 제약에 대한 행위자들의 인식을 확장시킴으로써 그 변혁 가능성을 제고한다.(23)
부르디외가 중요시한 사회학자의 덕목은 어떤 당파적 입장의 선택이나 정치적 편들기를 넘어서, 그러한 게임이 벌어지는 공간 자체를 객관화할 수 있는 과학적 관점을 확보하는 것이었다.(132) 그는 정통과 이단이 표면적인 대립 아래 공유하는 독사doxa 4, 집단적 믿음, 사회적 무의식을 분석하고 폭로하고자 애썼으며, 사회학자의 관점을 낳는 사회적 위치에 대한 자기 성찰을 학문 장의 작동 메커니즘에 대한 논의 속에 끝까지 밀어붙이고자 했다.(133)
*사회학적 성찰성의 실천은 지식 구성에 그 한계에 대한 인식(칸트적 의미의 ’비판‘)을 통합함으로써, 지식의 객관성과 보편성을 강화시켜줄 수 있다. *지식의 특수성(역사성, 지역성, 관점주의)에 대한 ‘메타meta' 관점의 확보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는 없으며 모든 지식의 가치는 비교 불가능하다는 식의 상대주의나 허무주의로 귀결하지 않는다.(23)
과학적인 사회학의 담론은 스스로 특수한 인식론적·사회적 조건들 아래서 구성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자기 관점까지도 객관화하는 담론이다.(398) 또 사회학자는 자기 담론이 가질 수밖에 없는 권력을 충분히 인식하면서, 그 오용 가능성을 통제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과학자’이다.(399)
2) 부르디외 사회학에 대한 비판적 평가
①부르디외는 계급 간 미세한 문화적 구별짓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지배 메커니즘을 규명하고, 중립적인 외양 아래 이루어지는 공화주의적 교육이 어떻게 계급질서를 재생산하는지 폭로하며, 기존의 사회구조가 피지배자들의 신체 속에 육화됨으로써 유지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지배에 대한 사회학적 비판의 외연을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았다.(82)
하지만 그는 사회 세계를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대립이라는 단순한 이분법 아래 파악하고, 피지배자들의 저항 능력을 과소평가하며, ‘좋은 권력’과 ‘나쁜 권력’, 민주주의와 전체주의를 구별할 수 있는 이론적 개념들(공론장, 시민사회, 정치적 대표성 등)을 갖추지 못함으로써 정치적 공간을 사상하고 있다는 비판 역시 받았다.(82) 근본적으로 이는 지배를 일종의 초월적 층위로 간주하고 사회를 일면적인 관점에서 지배 체계로만 보는 전후 유럽 좌파 지식인들의 ‘근대성 비판’ 전통 위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Touraine, 1992/1995; 1994 참조).(83) 5
②부르디외가 수행한 비판은 그 구체적 형식으로서 사회학을 특권화하면서, ‘경험적’이고 ‘객관적’이며 ‘성찰적’이고자 했다는 특징을 지닌다. 부르디외에게 과학을 규정하는 대표적인 속성인 객관성은 무엇보다도 발화자 스스로의 위치를 연구 대상으로 포괄하고 상대화하는 성찰성에 의해 뒷받침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르디외가 경험적 조사연구에 기반을 두는 자기식의 ‘성찰적 사회학’을 과학적 사회학과 동일시했으며, 그것을 비판의 최상의 형식으로 간주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사회적’이라는 전제는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 비판의 권능을 사회학에 부여하는 시각을 정당화했다.(83)
부르디외의 성찰적 사회학은 사회학적 지식을 통해 깨어난 사회적 행위자들과 사회적 무의식 및 개인적 이해관심에 갇혀 있는 다수의 행위자를 분리시키며, 전자에 의한 ‘사회학적 계몽’을 중요한 정치적 과제로 상정한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제약과 지배 관계에 대해 무지하다는 가정에서 출발하며, 사회과학을 무기로 그러한 무지로부터 해방된 사회과학적 주체들이 억압받는 피지배자들을 계몽을 통해 주체화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편다. 이때 사회과학은 제각기 다른 이해관심에 매여 있는 행위자들의 내적이고 주관적인 비판을 넘어서, ‘상대적으로 절대적인’ 혹은 ‘객관적인’ 비판을 제공하는 외적 준거로서 나타난다.(84)
③*부르디외는 자신의 사회학 이론과 분석 속에 대중 또는 피지배계급을 수동적이고 결정된 존재인양 그려냈다.(181) 또한 한 사회의 단절과 변화보다는 연속성과 재생산에 주목하는 동시에, 행위자 개인의 의식보다는 신체, 의지보다는 성향, 자유보다는 구조적 제약을 강조함으로써 정치적 행동의 여지와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입장을 취했다. 6(132) 부르디외가 보기에 지배는 단순히 물리적인 강제와 억압, 담론적인 이데올로기의 수준에서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인 믿음, 즉 독사의 형식으로 주체 안에 배태되어 있기에 한층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다. 또 피지배계급의 주체성은 사회화를 통해 지배 환경에 맞게 형성되며, 그 능력은 구조적 불평등의 소산인 자본의 부족과 결핍에 의해 심각하게 제약받는다.(181) 이처럼 피지배계급의 구성원들이 객관적인 구조를 체화하고 내면화함으로써 지배에 자연스럽게 공모하는 정도가 매우 강력하다면, 사회학적 계몽은 과연 얼마나 효과적일 수 있을까? 부르디외가 민중 스스로 극복하기 어려운 지배의 강고한 메커니즘을 부각시키고 계몽을 위한 지식인의 소명을 역설하면 할수록, 그의 계몽주의는 의도치 않은 엘리트주의적 입장으로 빠져들 위험성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더욱이 부르디외의 비판적 계몽주의는 결정 요인들에 대한 인식의 획득이 행위자의 자유를 증진시킨다는 스피노자식 가정에 기대어 있다.(182)
화용론적 사회학(볼탕스키, 테브노, 라투르, 칼롱 등이 개척)은 그러한 가정과 논리와 준거를 근본에서부터 문제 삼는다. 그것은 ①사회적 행위자들이 나름대로 도덕적 직관과 비판적 역량을 가지고서 특정한 가치들의 존중을 요구하며 불의를 비난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84) ②사회학적 계몽의 기획이 과학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으며, 실제 정치적 효과 면에서 명확한 한계를 가진다고 지적한다. (사회적 행위자들은 어떤 상황이 부당하다고 비판하기 위해 반드시 사회과학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들이 구사하는 비판의 언어 역시 대개 사회과학처럼 전문적이고 거리를 두는 형태를 취하지도 않는다) 3) 사회학자가 과학의 이름으로 다른 이들보다 더 정당하면서도 효과적인 비판의 목소리를 독점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학적 지식에 기초한 비판을 하나의 가능한 형식으로 상대화시키는 한편, 사회학자의 임무가 상이한 목소리와 다원적인 비판 형식들을 복원하고 공론장을 활성화함으로써 공동선을 추구하는 민주주의를 확장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85)
부르디외는 성찰성을 매개로 사회학을 과학화함으로써 정치적 비판이 갖는 주관성과 상대성이라는 한계를 뛰어넘고자 했지만, 정작 성찰적 사회학이 딛고 있는 비판적 입지와 정치적 프로그램에 대한 성찰에 둔감했다는 반박에 직면했다. 이는 비판자들에게서 사회학주의에 대한 반발과 새로운 정치철학 내지 도덕철학에 대한 모색이라는 양면적 반응을 불러일으켰다.(85) 이는 특히 부르디외가 사회학의 과학성과 경험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각종 주체 철학과 정치철학을 맹렬히 비판하고 거부한 데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부르디외의 사회학주의에 대한 비판은 사회학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들만큼이나 여러 결로 이루어졌다.(86)
4. 이론 읽기와 이론의 번역과 수용 - 부르디외
1) 철학과 이론의 상대화
*부르디외가 이론을 상대화하는 중심 원칙들은 다음과 같다. ①이론을 철저히 그 발생 연원(이론 생산자의 하비투스와 이론 생산 맥락으로서 학문 장)과 관련지어 파악한다. ②이론의 문제 지평과 논리 구조, 그 난점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③경험연구를 바탕으로 이론을 구성하고, 그 적용 사례들을 늘려간다든지 동일한 사례를 오랜 시간에 걸쳐 되풀이해 비교·분석함으로써 이론의 타당성을 제고한다. ④이론이 언제나 그 사회적 수용 맥락에 따라 다양하고 상이한 의미와 용도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한다. (25) (각주 7) 따라서 부르디외를 읽을 때에도 이 원칙들을 따라야 한다[정리자].
[다른 한편-정리자] 부르디외는 자신이 철학과 이론을 상대화하는 방식을 ‘실용적 관계 맺기’로 특징지은 바 있다.
①‘능동적 활용’: “(연구)대상을 구성하기 위한 규칙을 끌어내려는 목적으로” 이론을 읽는 것(Bourdieu, 1996c: 14)이다.(409) ··· *실용성은 이론적 노선과 더불어 취해야 하는 미덕이기 때문에 단순한 절충주의가 된다면 곤란하다.(‘성찰적 절충주의’) (410)
②‘물신 해체’: ➀저자나 텍스트를 물신 숭배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연구에 투입할 “생산적인 자본”으로 다루는 것.(410) ➁저자나 텍스트를 독자적이고 고립된 실체로서가 아니라 특정한 맥락에서 생산된 사회적 노동의 결과로 이해하는 것. 양자는 서로 밀접하게 연계된다. 7 물신 해체의 과업은 어떤 이론을 그것이 생겨난 지적 전통, 사회적 배경과 더불어 꼼꼼히 읽고 재해석하며 새로운 연구의 자양분으로 삼는 과정을 통해 성취될 수 있다.(411)
③‘사유 범주의 역사화’: “철학이나 문학 텍스트에 적합한 해독 이론의 기반은 ‘이중의 역사화’”다(Bourdieu, 1992b: 38). 저자, 메시지에 내재하는 이해 범주들을 역사화해야 한다. 저자가 반성하지 않은 채 이용하는 개념들과 데이터를 가능하게 만든 분류 체계들이 역사적으로 형성되었고, 상대적인 범주임을 인식해야 한다(Bourdieu, 1995a: 117; 1999b: 18).(412) 나아가 발신자뿐만 아니라 수신자의 이해 범주 또한 역사화해야만 한다.(‘삼중의 역사화’) 우리는 모두 특수한 지적 전통 안에 갇혀 있는 지방민들이며 동시에 지적인 자민족 중심주의에 빠질 위험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사유하기 위해 이용하는 수단, 즉 개념, 범주, 서열 등은 역사적으로 특수한 것이며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이 점을 언제나 의식하고 그 한계를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413)
2) 부르디외의 이론 읽기와 그 비판
부르디외가 자기 저작의 ‘바람직한’ 수용 여건을 따지는 「지적 작업의 사회 발생적 이해를 위하여」는 좀더 구체적인 외국 이론 읽기의 방법론을 암시한다. ··· 부르디외는 자기 저작이 외국에서 수용될 때 크게 두 가지 양상이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①논리의 진화 과정이 시간순으로 재구성되고 파악되기보다 (저작 번역의 시차 등과 같은 이유로) 무질서하게 뒤섞이는 것, ②개념이나 이론이 부분적이고 파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쓰이는 것. 그는 이 두 방식이 모두 “적절한 읽기”의 전제가 되는 지적 생산양식의 이해를 건너뛰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는 자신의 지적 기획을 가능하게 만든 인식론적·사회적 조건들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신의 창조물’에 대해서라면 언제나 “사회 발생적 관점”을 채택해야 한다(Bourdieu, 1993b: 264).(414)
①이론적 차원과 경험적 차원을 따로 떼어놓고 보아서는 안 된다. 그가 경험연구 속에서, 경험연구를 위해서 새로운 개념 도구들을 생산했으니만큼, 이론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구체적인 분석 과정에서 어떻게 쓰이고 작동하는지를 함께 파약해야 한다. 동시에 그는 분석 대상이 된 사례들을 단순히 현상적인 차이 수준에서 이해하지 말고, 그 아래의 불변항들을 포착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8 ··· 실체론적 관점이 아닌 관계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시기나 장소에 따르는 현상적 차이를 넘어서서 사회공간과 상징공간의 구조적 메커니즘 자체를 파악하고 토론할 수 있다. 그러한 차원에서 다른 시대, 다른 국가를 가로지르는 역사적·사회적 비교가 의미 있게 되고, 보편적 타당성을 얻는 개념이 나올 수 있다(Bourdieu, 1994a: 15-35).(415)
②외견상의 연구 대상과 진짜 연구 대상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중간 예술』, 『예술 사랑』은 표면적으로는 특정한 시점, 특수한 대상에 대한 경험연구여도, 연구의 진정한 목표는 이론적으로 구성된 관찰 자료를 가지고 ‘미학적 성향 및 능력의 발생과 구조’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데 있었다. (→‘예술적 지각의 사회학’ → 새로운 실천이론) (416)
[정리자] 이상길(2018)은 부르디외식 ‘이론 읽기의 이론’에 대한 비판을 제시한다. 부르디외는 그가 위치한 역사적·사회적 맥락의 산물이며, 여러 가지 면에서 ‘규범적’이다.
①이론 읽기에서 일정한 유형의 이론을 전제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져온 학문적 전통 속에서 자신의 시각을 구축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것을 누적적으로 발전시켜나가는 ‘서양’ 연구자의 이론 유형이다.(424) 부르디외가 그 기준에 관해 명확하게 말한 적은 없지만, 대체로 ‘더 나은’ 이론, 더 근본적이고 독창적이며 포괄적인 이론에 대한 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이러한 지식관은 과학주의와 유렵 중심주의의 혐의를 벗어나기 힘들다.(425)
②부르디외식 ‘이론 읽기의 이론’은 ‘적절한 읽기’를 전제한다. 이는 어떤 사유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와 ‘오해’를 구별한다.(425) 부르디외에게 커뮤니케이션은 발신자가 자신의 의도에 맞게 상징체계(메시지)를 생산하고, 수신자는 자신의 지각과 이해 범주에 따라 그것을 해독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적절한 해독에 필요한 수신자의 지적 수단과 능력이 (계급적으로) 불균등하게 계발·분포되어있다는 데서 수용의 다양성과 차별성이 나온다(Bourdieu, Darbel & Schnapper, 1966: 118-119 참조). (426) ··· 그럼에도 이러한 구분이 저자/작가에게 일정한 특권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부르디외는 의미 구성 과정에서 텍스트와 독자가 차지하는 역할을 상대적으로 간과하고 있다.(427)
이론의 ‘여행’은 생산자의 입장에서야 (본래의 생산 조건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에서) ‘탈맥락화’지만, 수용자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조건 속으로 들어와 배치되는) ‘재맥락화’다. 상이한 역사적·사회적 맥락에서 생산된 이론들이 발생의 시간순이나 배경과 관계없이 수용되고 축적되고 때로 무질서하게 조합되는 현상은, 이론적 혼종성을 낳고 전혀 예기치 못한 지적 창조로 이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이론의 발전이 누적적·선형적으로만 이루어질 필요는 없다. 그러한 사고는 오히려 서구에서 만들어진 근대적 지식 체제의 이상화된 이미지를 우리 사회에까지 무비판적으로 투영한 결과일 수 있다.(428)
[그러나-정리자] *‘학문의 국제정치’는 주변국의 창조성을 고양하는 방향으로만 진행되지 않으며, 그렇게 된다 할지라도 적지 않은 복합적 효과를 수반한다. 지식의 국제적인 유통은 결코 자유롭고 평등하며 조화로운 교환 과정이 아니다. 국가 간 정치경제적·상징적 세력 불평등은 학문적 ‘중심’과 ‘주변’의 불균형한 역학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홍성민 외, 2008). ‘이론 수입’의 문제가 언제나 예민한 이슈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429) 또한 외국 이론에 관한 우리의 ‘이론적’ 논의가 ‘스콜라적 관점’뿐만 아니라 ‘식민지적 관점’까지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406)
지식의 확산과 수용이 순전히 지배-피지배 관계의 효과 차원에서만 논의될 수는 없다.(429) 사회 환경과 학문 전통, (영어 헤게모니 아래에서) 언어의 이질성은 외국 이론 수용상의 불가피한 선별과 편향, 일정한 변형을 가져오며, 수용 집단 내부에서 정당한 수입자/해석자의 지위를 독점하려는 상징투쟁을 야기한다.(이론에 대한 단편적 해석, 유행성 소비열, 기계적 적용, 현학적 활용, 소모적인 논쟁, 절충주의. 이론이 현실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적절하게 이용되기보다는, 일시적으로 명멸하는 현상들에 재빠르게 응용되었다가 내버려지거나, 수사학을 위해 파편적으로 동원되거나, 기존 이론들의 더미 위에 별 의미 없이 누적된다.)
‘무질서한 읽기’와 ‘생산적인 오독’에 대한 예찬은 ‘이론적 유행’을 추종하면서 상징자본을 축적하는 전략에 유리하게 작용함으로써, 오히려 이론의 단기적 수입-폐기라는 악순환을 강화할 수 있다. 과도하게 상상된 수입국/수용자의 능동성과 주체성은 결국 현 상태의 비가시적인 권력 질서를 옹호하고 정당화하면서, 지식 이전 과정에서 엄연히 작동하는 불평등과 그 부정적 효과라는 문제를 가리게 될 것이다.(430)
외국 이론의 수용이 여러모로 불가피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필수적이라고까지 판단한다면, ‘오독의 자유방임 정책’보다는 ‘적절한 읽기의 전략’이 이론의 문제 설정을 더 적극적으로 전유하고 그 적용을 심화시킬 수 있는 탈식민적 방안으로 보인다.(430)··· '적절한‘ 읽기는 좁은 의미에서의 ’정확한‘ 텍스트 읽기로 환원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이론 읽기/쓰기 역시 다른 텍스트들의 읽기/쓰기와 마찬가지로 부득이한 오해와 오독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문화적 번역/오역‘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정리자] 텍스트의 존재 자체는 가능한 해석의 장을 제한하며, 우리는 잠정적으로 ’더 적절한‘ 해석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지적 교류와 문화적 번역 과정은 그 자체로 텍스트의 구성 원리(저자의 지적 기획, 이론의 문제틀과 개념들)가 일종의 “역사적 초월성”으로서 일정하게 소통 가능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Bourdieu, 1993b: 266). 이렇게 보자면, 실용적인 이해관심 속에서 생산자, 메시지, 수용자의 인식 범주 자체를 역사적 반성과 사회학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이루어지는 읽기는, (‘커뮤니케이션 가능성의 조건’이라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보편성·공통성 위에서 외국 이론을 구체적인 우리 현실의 역사성·특수성과 결합시키는 새로운 지식 생산의 기틀을 놓는다. 결국 읽기의 적절성은 이론의 지적·사회적 생산 맥락에 대한 이해와 수용 맥락의 현실을 바탕으로 한 ‘비판적 문제의식’ 위에 자리 잡는 셈이다.(431) 9
3) 부르디외의 번역과 수용
국내에서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 즈음 시작된 ‘부르디외 번역’이라는 사회문화적 실천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그것을 당시의 제도적·담론적 맥락 속에 자리매김해야만 한다. 그 맥락을 부르디외에 기대어 ‘장’으로 정의한다면, ‘부르디외 번역’에 대한 이해란 번역 실천을 국내 학술 장, 나아가 지식 장의 상태와 관련지어 포착한다는 뜻이다.(450) 10
일정한 자율성을 가지는 장은 외부의 이해관계와 영향력을 그대로 ‘반영’하기보다 재번역·재구조화한다.(450) 한 장에서 다른 장으로 사상이 유통되는 와중에 굴절이 일어난다. 굴절은 장이 지닌 상대적 자율성의 산물이자 지표이다. 그러므로 부르디외 번역 실천에 대한 이해란 부르디외 저작이 국내 학술 장과 지식 장에 옮겨지면서 어떠한 굴절을 겪었는지 파악하는 작업이 된다. 이때 굴절은 단순히 특정한 텍스트가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바뀌면서 일어나는 정보의 손실, 뉘앙스의 차이, 문맥의 변이 등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텍스트가 겪는 물질적 존재 양식상의 변형부터 해석적 참조 체계의 이동, 새로운 논쟁 구도와 지적 위계 체제로의 편입, 이 모든 것의 결과인 의미 지평과 효과의 변화까지 포함한다. 이때 굴절은 규범적인 개념이 아닌 기술적인 개념이다. 텍스트의 이전은 어떤 경우에도 불가피하게 일정한 굴절을 수반한다. 이는 지리적·공간적 이전뿐만 아니라 역사적 이전에도 해당된다. 동일한 장 내일지라도 시간적으로 다른 상태에 진입한 텍스트는 장이 변화했는데 그것은 변하지 않은 채 남아 있다는 그 사실 때문에 변화한다. 그러므로 역사적·지적·문화적 전통이 아예 상이한 국가의 장으로 들어간 외국의 텍스트가 굴절을 겪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굴절은 가치판단이 가해져야 할 ‘왜곡’이라기보다는, 이해를 위해 상세히 기술되어야 하는 ‘변환’일 뿐이다.(451)
부르디외가 국내 학계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 무렵으로 보인다. 1991년 교육사회학과 계급사회학, 문화사회학 분야에서 동시에 부르디외 사회학을 논하는 텍스트들이 나왔다(김기석, 1991; 윤정로, 1991; 오생근, 1991).(465) 부르디외 저작의 번역은 1990년대 중반 이후 본격화되었다가, 1998~2005년에 전성기를 맞았다(2000년 9월 부르디외의 한국 방문, 2002년 타계).(457) *초창기 부르디외의 번역·소개에는 출판사를 중심으로 한 일종의 새로운 ‘사상운동’과도 같은 면모도 있었다.(467) 그 운동은 기존 운동권 이념의 주축이었던 마르크스주의와 거리를 두고 때로 맞서는 ‘중도좌파’ 내지 ‘수정주의 좌파’의 성격을 띠었다.(468)
*프랑스 사상의 수입은 언어적·문화적 장벽 때문에 특히 1990년대 중반까지 프랑스 문학 연구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465) 또한 1990년대에는 프랑스에서 사회과학을 전공하고 귀국한 연구자들이 중요한 중개자 역할을 하면서 국내에 프랑스 사회학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했다.(469) 동시대 프랑스 사회학계의 중심 저자들의 저작이 부분적이고 무질서하게나마 소개되었다.(471)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는 국내에 ‘프랑스 이론’이 쏟아져 들어온 때이다.(471) 프랑스 사회학은 ‘사상’ 혹은 ‘이론’이라는 이름 아래 포괄적인 ‘불란서제 담론’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국가적 전통, 생산 조건, 스타일 때문에 생겨난 프랑스 사회학의 ‘이론적’, ‘철학적’ 때로는 ‘문학적(에세이적)’ 특성이 이를 촉진했다. *그런데 프랑스 철학과 사회학이 비슷한 시기에 수입되면서, 둘 사이의 차별성이 없어지거나 뒤섞이는 ‘경계 흐림’이 나타났다. 프랑스 철학이 ‘사회’철학화되었다면, ··· 프랑스 사회학은 사회‘철학’화되었다. *그리하여 훨씬 더 이론 중심적인 시각에서 수용된다. 국내에 쏟아져 들어온 ‘불란서제 담론’은 ‘사회 이론화된 철학 담론’과 ‘철학화된 사회학 담론’의 혼합물이었던 것이다.(472) 부르디외의 번역과 수용은 프랑스 철학과 사회학의 수입이라는 두 흐름의 교차점에 있었다.(471-472)
1990년대 이후 ‘불란서제 담론’의 급속한 수입에는 (국내 주류 학계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영미권 학계의 프랑스 사상에 대한 승인이라는 국제적 상황과 현실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이 야기한 사상적 공백이라는 국내적 상황의 결합이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했다.(483) 프랑스 이론들은 각종 ‘포스트주의’라는 ‘미국산 포장지’에 싸여 빠르게 수입되었는데, 마르크스주의의 퇴조를 가속화시키는 동시에 그로 인한 비판적 지식 체계의 공백을 메우는 구실을 했다(김성기, 1996; 진태원, 2014; Cusset, 2003 참조).(471) *그 결과 푸코나 들뢰즈, 부르디외 등의 수용은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실천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다. 초창기 부르디외의 번역·수용은 마르크스주의를 강력한 이해의 준거틀로 호명하고 있다.(483) ··· 부르디외 사회학이 마르크스주의와의 연속선상에서 논의되었던 데에는, 부르디외 이론의 내적인 속성이나 역자들 개인의 입장 못지않게 당시 국내 수용 장의 지적 분위기가 강하게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485) 11부르디외는 비슷한 시기에 수입된 프랑스 저자들, 특히 푸코, 보드리야르 등과의 유사성 속에서 ‘권력’, ‘일상’, ‘문화’를 핵심어로 이해되었고, 이는 넓게는 마르크스주의를 넘어서 비판적 사유의 기획을 지속하는 한 방편이기도 했다. 그는 일상생활과 문화 속에서 작동하는 미세한 권력과 상징적 차별의 메커니즘을 통해 후기 자본주의사회의 계급구조가 어떻게 재생산되는지 비판한 학자로 인식되었던 것이다.(472)
- *부르디외는 『자기분석에 대한 초고』에서 자신이 “온갖 종류의 모순과 긴장이 깃든 분열된 하비투스”를 가졌다고 고백한 바 있다(Bourdieu, 2004a: 127). 지역적·계급적 이중성이 원인으로 작용했을 법하다.(41) 프랑스 남서부 지방인 베아른의 당갱(고유의 사투리가 가장 널리 쓰이는 변방의 외딴 시골[500명 이하])에서 태어난 그가 포와 파리의 중고등학교 과정에서 10년 가까이 경험했던 기숙사 생활이 분열된 하비투스 형성의 가장 강력한 촉매제였다.(40-41) ([정리자] 그는 자신을 설명할 때 주로 시골 지역 출신이나 경제적 열위처럼 약자로서의 지위를 강조한다. 그에 반해 백인, 남성, 엘리트 대학교 출신, 엘리트 대학교 교수 등 상대적으로 유리한 지위는 자주 언급되지 않는다.) [본문으로]
- 부르디외는 이론을 이중적인 차원에서 접근한다. 명시적으로는 연구 노동의 실행을 이끄는 프로그램이라고 정의한다. ··· 부르디외는 경험-실증적 절차와 긴밀하게 얽혀 있는 사회과학 이론을 바람직한 것으로 제시하는데, 여기에는 명확히 말해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 이 연구 프로그램이 어떻게 구성되며 그 재료가 무엇인지 하는 것이다. 저자는 부르디외에게 ‘구체적인 연구 프로그램으로서의 이론’ 말고도, 그것을 구성하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지적 생산수단으로서의 이론’에 대한 또 다른 관념이 있으며, 후자는 ‘철학’과 동의어라고 본다. 부르디외는 연구 과정에서 ‘검증의 논리’ 못지않게 ‘발견의 논리’를 중시하며 이 두 가지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고 강조하는데, 사회과학에서 발견을 낳는 ‘창조 기술’은 특히 철학 공부를 통해 얻어질 수 있을 것이다(Bourdieu, Chamboredon & Passeron, 1968). 이는 부르디외가 실제로 자기 이론을 구축하는 과정을 검토해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사회학적 지식 이론’, 상징권력 이론‘, ’실천이론‘ 등을 ’창조‘하기 위해 그는 기존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종합하거나 변증법적 의미에서 지양하는 형식을 취한다.(422/각주15) 이는 아마도 부르디외가 구체적인 사회이론들이 결국 특정한 철학의 변이형이며, 그 철학 자체에 대한 비판이야말로 여러 상이한 이론들을 한꺼번에 정리할 수 있게 해주는 효율적인 방편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일 것이다. 핵심은 부르디외가 연구 프로그램으로서의 이론을 구축하기 위해, 그와는 약간 성격이 다른 이론적 자원인 철학을 동원하고 참조하며 또 비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사회과학 이론이 지니는 한 가지 특징, 즉 그 비판과 검증이 순전히 경험-실증적인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속성을 암시한다. 연구 프로그램으로서의 이론은 철학들을 재료로 삼아, 또 기존 철학들에 대한 비판을 매개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산된 이론은 일정 부분 철학이기도 하다.(423/각주15) [본문으로]
- 사회학적 실천에서 부르디외는 경험에 대한 이론의 인식론적 우위를 강조한다. 가장 기초적인 관찰과 자료 수집조차 의식적이고 체계적인 이론적 원칙들로 무장되어 있을수록 더 과학적이라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이론적 분석이 심화될수록 관찰 자료에 더 가까워진다는 확신”을 드러낸다(Bourdieu, 2002a: 9).(408) [본문으로]
- 온갖 사유와 행위 이면에서 암묵적으로 전제되는 믿음의 총체. 부르디외에게 그 개념은 이중적으로 나타난다. 1) 주어진 사회질서에 대한 사람들의 거의 자동적이고 즉각적인 애착, 2) 특정한 장 안에서 자연스럽고 올바른 것으로 여겨지는 사고와 행동 방식. 전체 사회 세계를 당연한 것처럼 수용하게 하는 독사, 각 장에 대한 적절한 소속을 규정짓는 독사가 있는 셈이다. 부르디외는 독사가 의식적·반성적 수준에서가 아닌 전의식적이고 반사적인 수준에서 작용하는 신체적인 것이라고 본다.(133) [본문으로]
- *[정리자] 그러나 (상징)권력·지배·폭력에 관한 부르디외의 논의는 구조의 강한 제약성, 피지배자의 약한 행위성의 특성을 보이는 동시에, 그것들의 아이러니까지 담아내고자 한다. 나에게는 그의 관점이 현실의 권력관계와 지배관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본문으로]
- [그러나-정리자] 부르디외는 “사회법칙이 사물의 본질 속에 영구히 새겨진 자연법칙이 아니라는 것, 과학이 드러내는 법칙은 행위를 처방하는 규범이나 명령하는 규칙이 아니며 경험적으로 확증되고 효력이 있다고 인정된 규칙성이라는 것, 따라서 이 (통계적) 규칙성은 정언명령처럼 부과되는 것이 아니며 복종해야 할 숙명 같은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한다(Bourdieu, 2002b[1992]: 243). 사회학적 규칙성에 대한 인식은 그것을 변형시키고자 하는 모든 행동의 성공 조건일 따름이다. 어떤 현상의 개연성을 안다면, 그것의 실현을 저지하려는 행동의 가능성 또한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144) “가능성이 실현되도록 만들기 위해 개연성에 대한 인식을 이용할 수 있다”는 태도다(Bourdieu, 1980b: 78; Bourdieu, 1992a: 169-170).(145) 바슐라르를 좇아 “숨겨진 것의 과학만이 있다”는 말을 즐겨 했던 그는 과학적 사회학이 결국 지배의 숨겨진 메커니즘을 폭로함으로써 기존의 불평등한 권력 체제에 비판적인 기능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Bachelard, 1949: 38).(82) [본문으로]
- 사상의 국제적 유통 과정에서 저자나 텍스트는 대개 맥락과 함께 이전되지 못하는데, 그러한 상황에서 물신화의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Bourdieu, 2002b: 4). 우리는 텍스트 내에서 어떤 개념이나 주장, 연구 결과가 지시하는 맥락, 그것들이 나오게 된 외적 맥락을 제대로 읽지 못하며, 그것을 다시 ‘이론화’해 받아들이면서 추상적·보편적인 논리 체계로 만드는 것이다. 이를 ‘내적 독해’라고 할 수 있다. 텍스트를 그 자체 자족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 다른 어떤 것도 참조하지 않는 독해로, 텍스트를 생산 장의 맥락에서 탈구시킨 채 수용 장의 맥락에만 연결시킴으로써 비현실화하고, 보편적이며, 영원한 것으로 만든다.(411) [본문으로]
- 예 - 구별짓기. 핵심은 여전히 부르주아계급이 다른 계급들과 차별화된 취향을 추구하고 또 가진다는 것이며, 그러한 취향이 계급간 상징적인 경계 만들기에 이용된다는 것이다.(415) [본문으로]
- 이론 수입 과정에서 나타나는 두 가지 ‘이념형적 태도’의 비효율성이 있다. ①한국 사회의 특수성을 역설하면서 수입 이론 자체를 거부하거나 백안시하는 태도, ②이론을 ‘실용적으로’ 대한다는 명분 아래 즉각적·단편적 경험과 사실들에 적용·검증하는 데에서 그치는 태도. 두 태도는 모두 이론에 대한 이론적인 논의 자체를 비난하거나 평가절하한다.(434) *또 다른 양식의 이론 읽기/쓰기가 가능하다는 점을 감추는 것은 특히 문제다. 이는 기존 이론의 수정이나 새로운 이론 생산을 저해함으로써 학문적 주변성을 강화시킨다.(435) [본문으로]
- [정리자]**‘부르디외 번역’을 ‘장’과 관련지어 이해하는 것은 또한 그것을 문화자본과 연결하여 이해하는 것이다. 부르디외식으로 보면 이론문화(연구 과정에서 실용적인 도움을 얻기 위해 참조할 수 있는 저자들을 일러주고 이론적인 연장통을 마련해주는 지식 체계)란 한 사회의 학문 장 내에 축적된 문화자본이다. ··· 국가별로 축적된 문화자본의 차이는 각 사회 특유의 학문 풍토로 이어지며 과학 발전의 차이를 낳는다.(420) ··· 국가별 학문 장의 독자성은 그 고유한 역사의 산물이다. 그것은 이론문화에서 ‘수출’이나 ‘이식’이 어려운 구성부분 혹은 외국 저자, 텍스트, 이론에 대한 독특한 이해와 재현을 통해 명확하게 드러난다.(421/각주14) [본문으로]
-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부르디외 번역을 ‘참여 지식인’의 틀 안에서 제시하는 해설이 일반화된다.(487) [본문으로]
'읽은 것 > 부르디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리] 1부 사회적 실천론을 향해 부르디외 사회학의 구조와 논리 (0) | 2019.05.13 |
---|---|
[정리] 3부 성찰적 사회학의 실천 - 파리 워크숍 (『성찰적 사회학으로의 초대』) (0) | 2019.05.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