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유뱅크스. 자동화된 불평등(Automating Inequality: How high-tech tools profile, police, and punish the poor)
한국 국가의 빈곤 통치에 관해 쓰게 된다면, 2000-2010년대에 나타난(내가 몸으로 겪고 그것과의 차이를 들은) '디지털 전환'에 관해 충분히 잘 말할 수 있어야 할 테다. 어려운 일이다.
한국과 같은 국가에서는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기만 하더라도(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빈곤과 인종 문제가 교실에서 거의 교차하지 않았기에, 외형 자체가 빈곤의 낙인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눈 감고 부모님 두 분 중 한 분이라도 없는 사람은 손을 들라'는 선생의 지시나 갱지에 부모의 직업을 적어 맨뒷자리 학생이 수거해 제출하는 매해의 의례들은 '가족의 비정상성'과 '빈곤'을 쉽게 노출할 수 있도록 했다. 복지의 수급은 대면과 현장으로 이루어졌고 그것은 곧 낙인, 특히 지독한 자기-낙인으로 이어졌다.
복지 제도에서의 디지털-전환은 이러한 교실의 풍경을 바꿔놓았다. 이제 교사도 적절한 사유와 권한이 없다면, 자신의 반의 특정 학생의 사회경제적 상태를 일방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고 한다. 코드의 익명성이 과거의 '야만'을 무찌른 것이다. 그리하여 적어도 과거와 같은 낙인을 생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디지털 전환은 명백히 빈곤에 관한 새로운 통치와 익숙한 낙인으로 이어진다. 한국처럼 공공부조제도의 수급 기준이 강력하고 계층 외의 비난 요인이 더해지지 않는 국가에서는 '빈곤층의 비윤리성과 수급 자격'의 문제가 비교적 덜 이슈가 되어왔다. 그럼에도 특정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는 '부정수급'으로 상징되는 위의 문제와 연결되고 빈곤층에 대한 불신의 눈으로 이어진다(예를 들면, 이영학 사건). 나는 내가 겪었던 낙인과는 다르지만, 나의 후세대 빈곤층 학생들이 또다른 '복지의 경험'과 그로 인한 '(자기)낙인'을 겪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질적 연구들은 있겠지만, 이것을 국가 통치의 시선에서 바라본 작업이 국내에 있을까 싶다. 그만큼이나 빈곤은 연구 관심에서 가까운 동시에 멀어져있다.
이 책은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상기시킨다. 그것도 이것도 여기도 모두 현실이니까. 아직은 어지러운 단상들뿐이지만, 누군가는 무엇에 관해 말해야 한다는 생각만큼은 분명하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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